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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안디옥 교회처럼 (행13:1-3) *창립 51주년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6-14 | 조회: 508
안디옥 교회처럼 행13:1-3. 2020. 6/14. 창립 51주년

 

할렐루야!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교회는 오늘 51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51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늘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51년 전에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워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닮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보여주시고자 우리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이런 건강한 교회를 섬기기 위해 10명의 임직자 후보를 피택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한 공동체가 얼마큼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어떤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와 매우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공동체, 비젼이 없는 공동체는 결국 후퇴하고 점점 소멸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창립 51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가 닮고 싶은 이 지상 교회 중에 하나인 안디옥 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을 때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행11:19절에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보면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던 재산, 그리고 꿈, 미래를 다 잃고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까지 떠밀려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물꼬를 여는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세상 앞에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13장에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그 키가 바로 성령입니다. 2절에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려가서 4절입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가” 그리고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것이 성령님으로 시작하여 성령님으로 끝납니다. 13장에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지시하고, 사람들은 순종하고” 이들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며 살았던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Ⅰ. 하나 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구성원들의 연령을 보십시오.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젊은 사람 사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습니다. 또 자라온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귀족출신으로 땅을 기증할 정도로 부자였던 사람입니다. 마나엔이라는 사람은 당시 예루살렘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헤롯왕의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젖동생입니다. 대단한 귀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Negro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즉 흑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도 흑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레네가 북아프리카지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한 유대인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석학으로 불리 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다섯 사람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처럼 보인 이 구성원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행11:26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훈련받았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모시고 와 둘이 함께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 제자들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제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군중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배참석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 제자란 말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낮선 이방 땅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이들 속에 얼마나 원망과 불평이 많았겠습니까? 인생살이 평안함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가서 표현할 때도 없는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들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속에 편견, 불만, 갈등의 벽을 깨고 하나되는 성숙한 교회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멋지게 살았으면 세상 사람들이 야!!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야 하는 칭찬을 보냈겠습니까?

 

Ⅱ, 영적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2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영적인 체험이 없이도 교회에 다닐 수 있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참 믿음을 배우지 못하고도 교회에 버젓이 다닐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처럼 엄청난 비극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을 이루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따라서 먼저 믿은 우리는 목숨 걸고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영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를 섬겨”라고 할 때 섬긴다는 말은 본래 예배드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면 예배드렸지 왜 금식까지 했을까요? 그들 모두는 금식하며 기도할 정도로 영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누가 이르시되? “성령이 이르시되” 안디옥 교회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정도로 영적으로 충만했으며, 영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두 17번 나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속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Ⅲ. 절대 순종과 헌신하는 교회입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여기에서 ‘따로 세우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목회를 잘하고 있는 담임 목사와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안디옥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간 두 지도자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제 좀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어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갑자기 교회의 핵심인물인 바나바와 바울을 달라는 이 음성 앞에 하나님께서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겨우 교회가 안정되어 가는 순간인데, 선교를 하라니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습니다. 자, 주께서 안디옥 교인들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은 그들의 응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헌신을 요청한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의 교회도 할 일이 많아 일꾼이 많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을 위한 순종은 때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에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란 없습니다. 이 순종의 열매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영적 불모지인 유럽이 기독교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나고 바나바는 버려진 마가를 세워 신약성경 최초로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교회나와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예배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삶이고 목적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꼭 외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의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고 하는 일은 다릅니다.  교사, 공무원, 주부, 직장인, 하나님이 보낸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선교입니다. 전문선교사로 가면 복음 선교입니다. 일반직장으로 가면 평신도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선교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순종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3부 반주자 선생님이 지난 주일이 지난 월요일 오후에 메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 양윤경 반주자에요. 저에게 오늘 아주 놀랍고 감사한 일이 생겨서 연락 드렸어요. 사실 제가 3주전부터 매주 주일 오후 1:30분에 친구와 만나서 같이 하기로 한 일정이 있었는데요. 실은 제가 동성교회 오후예배 반주를 갑자기 맡게 되서 매주 그 친구와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계속 3주째 취소를 하던 상황이었어요! 근데 3부예배 마치고 중간에 거의 못쉬고 바로 오후예배 특송하는 두 팀을 연습 반주하고 또 예배반주까지 하니까 제가 몸이 힘들기도 하고 또 친구와 매주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 마음에 약간 짜증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어제 밤엔 마음이 어려운채로 잠이 들었는데요 .오늘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갑자기 코로나 증상이 생겨서 병원이라고 하네요. 제가 만약 동성교회 오후예배 반주를 맡지 않았더라면 계획한 그대로 매주 친구와 만나서 함께 했을꺼고 그럼 저도 같이 코로나 에 걸려서 지금 발칵 뒤집어졌을꺼에요. 오후예배 반주로 인해 그 친구와의 일정을 계속 연달아 취소하게 되서 코로나를 피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께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서 메세지 드려요! 끝까지 제게 맡겨 주신 사역에 충성을 다할게요!

 

”제가 이 메시지를 받고 두려움에 떨었고, 그리고 감사가 나왔습니다. 금요 철야 반주와 오후 반주자가 없어서 3명이나 면접하고 했는데 다 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란 사실 앞에 얼마나 감사가 나오는지 몰라요. 만약 우리 양 선생님이 오후를 안 했으면 교회 확진자로 오늘 창립 감사 예배도, 임직자 세우는 일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51년 동안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 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품에 우리 교회를 품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사랑의 품에 우리 교회를 품어 주셨고,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세우는 이 시간! 명심을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으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품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내 지체를 품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품어야 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며,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이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은혜를 갈망하며 사모하며 오늘 들려지는 말씀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고난 한 복판에 세워진 이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멋지게 살았으면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작은 예수라고 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이 이 지역과 세상에 희망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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