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며 사십니까? - 맥추 감사절 신16:16-17. 2020. 7/5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제가 설교해야 할 내용이겠지만, 먼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도대체 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요즘 맥추감사주일 지키지 않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맥추 감사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로만 안다면 이 맥추 감사절 속에 담긴 풍성한 복을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맥추 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올해 하나님께서 주신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정확한 대답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첫 수확일 수 있겠고 직장 다니는 사람에게는 첫 월급일 수 있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첫 매상 수입일 수 있겠고, 첫 배당금, 첫 계약금 첫 번째 태어난 아이 등등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를 꼭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의미를 모르면 우리는 그저 절기 헌금으로 마지 못해 드리는 정도가 될 수 밖에 없고 이 맥추감사주일은 사실 아무런 복도 은혜도 없는 주일이 되고 맙니다. “맥추감사헌금? 당신이 알아서 해”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첫 열매에 대하여 무감각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첫 열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마음은 깜짝 놀랄 정도로 심각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는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레 23:10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는, 주가 주는 그 땅으로 들어가, 곡식을 거둘 때에, 너희가 거둔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가져 가야 한다“ 그리고 14절에도 “너희가 이렇게 너희의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바로 그 날까지는, 빵도, 볶은 곡식도, 햇곡식도 먹지 못한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만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농사짓고 거둔 첫 수확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으며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엄히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 해만 아니라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레23:14 하반절에 “...이것은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농사지은 것만 아닙니다. 민 3:40-51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의 숫자를 다 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대로 레위 인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첫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자를 세어 보니 레위인 전체 수보다 273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사람 당 다섯 세겔로 하여 속전으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신 16:11에서는 이 맥추절을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노비나 성 중에 있는 이방인들과 고아와 과부도 지키게 했습니다. 출 34:20에서는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하셨을 정도입니다.
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첫 열매 감사를 강조하셨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첫 열매를 거둘 때는 언제나 일 년 중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그러므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려 할 때, “첫 열매는 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자녀들도 물을 것입니다. “아빠 엄마, 첫 열매를 왜 하나님께 바쳐야 하나요?” 그 때 하나님께서 대답할 말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질문이 생기면 ‘너희가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중,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실 때, 너희는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설주에 발라 그 재앙에서 건져주셨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첫 열매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또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려면 자신이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아십니까? 호세아라는 훌륭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호세아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이 시대의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 밖에 나가 다른 남자에 의해 임신하고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결국 자기 아이가 아닌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세 아이를 고멜이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아이들과 남편을 내 팽캐치고 가출을 합니다.
이런 비극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가서 타인에게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아마 호세아는 죽고 싶은 처절한 불행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번에도 음부가 된 고멜을 돈을 주고 사다가 다시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간음한 여인과 결혼한 선지자 호세아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곤혹스러운 일을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고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고멜은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에 의해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호세아가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음에 빠져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왜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당신의 백성이라 불러 주셨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똑똑해서 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음란한 고멜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몇 번이고 용서하고 다시 품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구원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단순히 올해도 첫 열매를 주셨다는 감사주일만 아닙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스라엘에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잊으면 이스라엘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까? 왜 독생자를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계산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사랑입니다.
Ⅱ. 게다가 우리에게는 맥추감사주일에 더 크게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후 7주 만에 지키는 절기라 하여 칠칠절, 오십 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라 하여 초실 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언제 우리에게 임하셨는지 아십니까? 행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오순절은 맥추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맥추절을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 지켰기에 오순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습니다. 신16: 거기에다가 일곱 번째 안식일 다음날까지 더하면 꼭 오십 일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햇곡식을 주에게 곡식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따로 성령강림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절기상 맥추감사주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받은 우리를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구약 맥추절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맥추절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첫 열매,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맥추절은 애굽에서 나온지 50일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그 백성을 광야교회로 조직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모일 때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주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약교회를 우리에게 주셨고 이 교회를 통하여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며 이 교회 안에서 하늘가는 복을 배우게 되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써 살아가는 이 행복감 이것을 감사하는 절기가 맥추절입니다.
Ⅲ. 둘째는 감사는 모든 사람이 다 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16절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하나님께서 1년에 3차례씩 명절을 지키라고 당부하시면서 재미있는 명령 1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킬 때에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들만 이렇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남자들만 감사하라는 말일까요? 언뜻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얼굴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맥추절이 되면 곡식을 추수한 다음에 모든 가족이 모여서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데 대해 감사했습니다.
Ⅳ 예물을 들고 나와 감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여기 복을 주신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잠 3: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명령하시기를, 3번 절기를 지키면서 감사를 드릴 때 반드시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16절에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그리고 17절에는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본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제물이라고 불렀는데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 곧 희생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헌금의 성격은 어느 정도 희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그것은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성의 없는 헌금행위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마치 싸구려 은혜인 것처럼 은혜를 격하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순교자요 신학자였던 본 훼퍼 목사는 당시의 독일교회가 무력해진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cheap grace)로 전락시킨 것 그리고 희생정신을 상실한데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그러면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이란 희생만 하다가 마는 것이냐고 물을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은 일종의 씨 뿌림과 같은 것입니다. 씨 뿌림은 땀흘림이요 희생이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밀을 안다면 희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후9장에서는 이것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고후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은 결코 자학적인 희생이 아닌 기쁨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래드패츠라는 신학자요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떤 교인이 와서 그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그때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눈만 뜨면 우리 부부를 보기만 하면 그는 줄곧 무엇인가를 달라고 졸라댔지요.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지난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자매님, 살아있는 교회는 헌신을 요구합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자매님의 몫이지요." 래드패츠는 C.T.Studd의 말을 인용하면서 헌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헌신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요즘, 우리 모두가 힘든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지금 우리 모두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이 터널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빠져나오긴 하겠지만, 어떤 것들이 우리를 기다릴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기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