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2 아주 특별한 기쁨 (빌1:12-21).
할렐루야!! 오늘 3부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주님 주시는 평안과 은혜가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웃는 얼굴로 한 번 인사하시죠. ‘화목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여러분을 보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오늘 2주만에 여러분 앞에 서니 정말 진정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한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특별히 2:8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기 에덴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서는 이 에덴동산을 ‘기쁨의 낙원’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을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삶을 어땠을까요? 창 3장을 보면 우선 남자에게는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고통이 주어졌고, 여자에게는 자식을 낳아 길러야 하는 양육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병들고 늙어가고 결국 죽어야 하는 죽음의 고통이 더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에덴동산의 그 기쁨을 맛볼 수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이 아닌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그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의 그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실제로 주의 구원을 맛 본 사람들은 이 기쁨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요 15: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누리시던 기쁨이 넘치는데 그 기쁨을 구원 받은 주님의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주시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쁨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꿔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슬픔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합니다. 이 기쁨이 절망 가운데 주저앉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이 기쁨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더더욱 아주 특별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한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기쁨을 모르는 것은 기쁨에 대한 정의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기쁨을 다 빼앗기고 그 속에 기쁨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환경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19로 인해 이 환경 앞에 세상의 사람들이 기쁨을 잃어가고 있고 인간관계는 점점 메말라가고 그리고 자고 깨면 죽음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에게 처한 환경이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리어 디딤돌로 삼고 세상에 자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담 안에 갇힌 자신이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어렵고 힘든 자리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1.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요.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나의 당한 일"이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죄도 없이 로마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거의 5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옥의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그 감옥에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 같은 생각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도 확실히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그 고난의 끝에서 엄청난 영광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2절에 절망의 한복판에서 외칩니다. 내가 지금까지 당한 일 때문에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진전”이라는 말은 옛날 성경에는 진보 “프로코페”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군대에서 공병대가 앞서 나아가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길을 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염두해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가 로마의 길을 잘 알지 않느냐? 저들이 계속해서 전차와 군대가 나아갈 길을 만들어 땅을 점령해 나아가듯이, 지금 너희가 걱정하고 있는 그 일 때문에, 즉 내가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열리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이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도 이 흔들리지 않는 이 자세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이런 위기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포자기, 절망, 불평, 원망의 넉두리를 하기 쉽습니다. "바로 살아 보겠다 몸부림하는 나를 5년 세월 감옥에 넣어두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부귀영화를 위해서 달려왔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나의 모든 것은 끝났다, 깨끗이 포기하자, 그만두자, 전도고 뭐고 이제 나는 끝이다."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감옥이 나의 꿈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풍랑이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생의 목적을 뒤집어 놓지 못할 것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이 상황, 이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선 믿음의 사람들은 쉽게 지금 다가오는 환경 앞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힘들고 어렵지만 자기는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으로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특별한 기쁨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게 해줍니다.
Ⅱ. 바울이 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은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그 아픔을 잘 극복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16-17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 보면 바울이 감옥에서도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며 크게 도전을 받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16절에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이들은 바울을 따르며 더 적극적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의 사람들은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소위 텃세를 부리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로마교회 내에 쌓아놓은 영적 지도력이 손상을 입을까 두려워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저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더 많게 하려고 열심히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을 괴롭게 할 줄 알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다가 감옥에 갇혀있는데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중보기도는 못할망정 자기를 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치하게 자파세력을 키우려고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무척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니 기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속상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차분하게 결과를 내다보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넘어섭니다. 우리의 감정이 좌우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아주 특별한 기쁨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손익 계산서란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바울은 감옥에서 차분하게 신앙의 손익 계산서를 작성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가 그동안 세상에서 거머쥐었던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살 의욕을 잃고 극단적 선택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옥에서 자신의 인생의 장부를 꺼내 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아무 손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익이 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개인적으로 좀 불편하고 힘들긴 했지만, 이 일로 오히려 더 주님과 가까워 졌습니다. 바울은 감옥 기도원에서 특별 신앙 수련회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증거하고 싶었던 복음이 로마의 핵심 계층인 시위대 군사들에게까지 전파되지 않았습니까? 당시 황제를 지키기 위해 뽑힌 시위대에서 근무하는 것은 당시 청년들의 로망입니다. 이런 엘리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또 감옥 밖에 있던 이방인 교회의 성도들이 분발하여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손해가 아니라 남는 장사였습니다. 정말 기쁜일이 아닙니까? 춤을 춰도 괞찮을 정도로 승리 의식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8절에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합니다. 속상한 일이 있고, 마음이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기쁨을 채워주십니다. 이 세상에 없는 아주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십니다.
Ⅲ.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죽음도 불사하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죽음 앞에 자유로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신 앞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이 생명을 어떻게 쓰시려하십니까?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숨을 쉽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여러분, 생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숨을 쉽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죽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이번에 코로나 19로 사망한 자들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TV를 통해서 느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죽으면 검은 봉지에 담아서 시체를 태우거나 깊은 구덩이에 묻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이번에 서울 시장의 자살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살려고 아둥바둥 살아왔습니까? 자살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죽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 몰았습니까? 참 우리 인생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기지 않으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인생에 대해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며, 또 영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그 분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재판이 끝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여기 보면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울은 삶과 죽음의 절대 절명의 위기 가운데 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는 죽음의 위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명은 그의 삶에 새로운 가치였습니다. 숱한 문제 앞에도 당당합니다.
요즘 국무총리가 한국교회를 향해 7/8일에 명령을 합니다. 마치 코로나 19의 진원지가 교회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사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방역을 하고 안전을 지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해 정규 예배는 드리되 소모임이나 점심식사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길시 구상권을 청구하고 위반한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협박성 발표를 했습니다. 참 힘든 현 상황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그동안 모든 한국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고 예배를 드리며 방역, 그리고 식사 문제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당국이 이 사실을 안다면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발표는 마치 감염의 온상지가 교회인 것처럼 매도하는 처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심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이일로 교회가 동요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발표내용의 세부적 지침은 형평성 원리에도 안맞습니다. 빠른 시일에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삶이 최악의 환경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배신당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동행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