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앞에서 왕하 19:14-19. 2020. 7/19.
위기에 대한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위기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위기는 위기인 것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사태에서 이 명언이 그대로 입증되었습니다. 처음 중국우한에서 코로나감염환자가 나왔을 때 우한시당국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정부도 일이 커지고 전문가들의 경고가 있었는데도 감추기에 급급했고, 위기관리의 핵심인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결국 위기인데도 위기인줄 모르고 잘못 대처하다가 큰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은 중국이나 아시아에서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는데도 강 건너 불 보듯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비 없이 확산되자 허둥대다가 더 이상 손을 쓰기 힘든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역시 위기인데도 위기인 줄 모르고 있다가 큰 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코로나19사태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위기를 실감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지 반년이 되어가면서 예상보다도 더 심각한 피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태가 끝이 난다고 해도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점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이 코로나19사태는 교회에도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대략 6만개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 중에 80%정도가 교인이 50명이하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들의 3/4정도는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겨우 임대료내고 운영비를 감당하고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교단이나 대형교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태이후 교인들이 절반 이상 출석하지 못하면서 버티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문을 닫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고, 조금 더 장기화될 경우 많은 교회들이 문들 닫게 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19사태는 세상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고 있습니다. 특히 신천지집단에서 시작된 집단감염 때문에 교회와 이단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사람들로서는 마치 교회가 이 사태에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지난주 총리가 느닷없이 교회 소모임에 대한 제제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정규예배 이외의 모임을 금하며 어길 시에는 300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코로나19사태와 관련한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양 발표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을 부정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고자 할 때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는데도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이 사태가 교인들 사이에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연치료 전문가들은 흡연자가 3주 만 금연에 성공하면 평생 금연에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3주 만 지속하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 나오지 않은지 3주를 넘어 다섯 달이 되어갑니다. 이제 교회 나오지 않는 것이 매우 익숙한 습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웬만큼 믿음이 깊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시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갑니다.
더 큰 문제는 다음세대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내에 교회학교가 있는 교회가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태이후 교회학교 예배를 유지하고 있는 교회는 그 중에서도 1/3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에서 교회학교 예배에 출석하고 있는 학생들은 절반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전체 교회의 약 15% 정도의 교회만 교회학교 예배를 유지하고 있고, 그것도 절반정도만 출석을 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태이후 다음세대 신 앙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무척이나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이 코로나19사태가 앞으로 반년이상 더 이어진다면 교회는 그야말로 회복 불가능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과거에 없었고 또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위기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왕 시절, 당시 초강대국 앗수르가 침공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제 앗수르는 그 여세를 몰아 남왕국을 침공해왔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각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먼저 앗수르의 산헤립왕은 랍사게를 보내서 궁지에 몰린 히스기야왕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항복하라고 최후의 통첩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힘입어서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앗수르왕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이 도와준다고 버텼지만 모두가 다 망했다는 것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가 도와준다는 그런 말에 속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항복해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결사항전을 할 것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 위기상황 속에서 히스기야왕과 이스라엘백성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 것입니다.
Ⅰ. 주님만 바라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히스기야왕이 항복을 촉구하는 최후의 통첩을 전해들은 뒤 바로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왕이 앗수르왕이 보낸 협박편지를 받고서는 바로 그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가서 여호와 앞에 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의 행동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기를 느끼자마자 성전으로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왕으로서 히스기야는 위기상황을 인식하게 됐을 때 먼저 대신들을 모아 회의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핵심측근이나 자문단이나 경륜이 많은 원로들을 모아 의견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왜 성전으로 나아갔을까요?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던 그날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우리는 굵은 장대비가 세차게 몰아치면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는 우박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황과 불이 장대비처럼, 우박처럼 쏟아부어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읍뿐만 아니라 온 들에도 마치 화산이 터져 용암이 흘러넘치는 것같이 붉은 유황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온통 시커먼 연기가 자욱합니다. 본문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롯의 아내였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 죽고 말았는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왜 두 사람이 똑같이 유황과 불의 재난으로 인해 모든 것이 타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여 소금기둥이 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바라봄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그곳에 나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것은 걱정과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달랐습니다.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 멸망당하는 그 소돔과 고모라를 쳐다보았겠습니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라고 말씀할 때 ‘뒤를 돌아보았다’는 말은 성경언어(히브리어)로 ‘나바트’입니다. 이 말은 그냥 구경삼아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골똘히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뭔가를 간직한 채 바라보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롯의 아내는 마음속에 뭔가를 간직한 채 멸망당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골똘히 쳐다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히스기야왕은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도와주셔서 내가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성도들이 찾아 나와서 주님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얻는 곳입니다. 그래서 위기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고, 또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얻게 하는 그런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교회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교회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Ⅱ.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여기 ‘해산할 힘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항복하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어찌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싸울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앗수르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히스기야는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얼마나 솔직한 고백입니까?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여울 정도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히스기야왕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다웃 이후로 가장 능력있고 믿음을 가지 왕이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해산을 하긴 해야 하는데 해산 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앗수르가 군대를 이끌고 남쪽 유다의 성 46군데를 정복을 합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1차 침공 때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그 엄청난 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앗수르가 그 돈을 받고도 재차 침공해 온 것입니다. 이제 이런 모든 인간적인 노력이 허사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주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위기 앞에 무능합니다. 저희들은 이 위기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자리에서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어떻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참 많이 수고했는데도 나에게 돌아온 것이 너무나도 작고 미약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탄식하며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로마서 8:28)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엎드려 고백할 뿐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기도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자기들을 이 위기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자기에게는 ‘주밖에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백이 참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의 고백을 소중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시고 그 고백 위에서 역사하십니다. 오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가 이런 고백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런 위기를 이겨낼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께서 역사하셔야만 이런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음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Ⅲ. 생사를 건 기도를 합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16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19절을 보면 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 히스기야가 위기를 겪으며 지금의 이 현실을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면초가에 처할 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일상의 기도가 아닌 부르짖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일상의 기도가 필요하지만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가장 특별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면초가의 상황을 만나도 위는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열려 있는 하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르짖는 순간 기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순간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기도의 날개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특권을 행사하며 하늘을 향해 나래를 펼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은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어느 정도 기도를 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꿩은 날개를 가지고 잘 날아다니는 새입니다. 상당히 높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꿩은 위험에 직 면하면 당황해서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땅을 걸어서 도망가다가 다급하면 머리를 쳐박고 맙니다. 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상대도 못보는 줄로 아는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쉽게 잡히는 참 바보밭은 새입니다. 정말 날아야 할 때 날지 못하는 꿩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의 날개를 주셨는데 정작 간절히 부르짖으며 높이 날아올라야 할 때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낙망하며 고개를 쳐박고 스스로 위험에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큰일이라고 하면서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가장 어려운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닌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모두가 어렵다고 불안해하며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직장과 사업장을 위해, 우리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기도했다면 이제 기대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은 두 가지 기대를 약속합니다. 그 하나는 응답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19:20을 보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위기 가운데 성전에 나와 기도한 것을 다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9:35를 보면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사들을 치신 것입니다. 36-37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신의 묘에 경배하던 중 자객들의 칼에 죽고 말았습니다. 삽시간에 되어진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그들을 무너지게 하신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노력을 다 해 보셨다구요? 정말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 부르짖어 기도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상황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위기의 시대에 꿩처럼 머리를 쳐박고 위기가 지나가기만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셔야만 우리 민족이 이 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