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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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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찾아서 (창12:1-4) 2010. 2. 2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2-22 | 조회: 1883
얼마 전에 남아공에서 내년에 열릴 월드컵 조 추첨을 하는데 영상에 제가 보고 싶던 한 인물을 보고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만델라 전 대통령이 나와서 축하 메시지를 전하더라구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아예 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곧,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그 당시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석방되던 날 전 세계 매스컴에 비춰진 만델라의 모습이었습니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참 자유자의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대권을 이어 받은 만델라 대통령은 한 맺힌 사람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또한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만델라에게서 희망이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그동안 품어왔던 희망이 부서지고 깨져 절망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희망은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존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Homo Esperance)이다!”

오늘부터 ‘희망의 날개를 펴서’라는 주제로 우리 교회는 2010년 부흥 사경회를 갖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창세기12장에서부터 시작해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희망의 미래를 향해서 나아갔던 한 사람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누굴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고향을 떠남으로써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창세기12장1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이 떠나라는 명령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그 땅으로 가라’ 이런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세 가지를 떠나라고 그랬어요. ①본토를 떠나라. 네 잔뼈가 굵어 왔던 그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주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②네 친척을 떠나라. 너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네게 영향을 주었던 과거의 영향력에서부터 이제는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③그리고 네 아비 집도 떠나라. 아비는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가치관과 희망찬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영향에서부터도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주인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우리 역시 새로운 변화,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가는 출발선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떠남이 축복의 떠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그 교훈을 배우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출발이 축복의 출발, 축복의 떠남이 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야합니다.
지금까지 정들었던 고향 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로 교제하던 사람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지붕 아래에서 의지했던 식구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이가 75세나 된 노인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질문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백발이 된 노인네 고생시키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잘 살고 있는 사람 바보 만들기 위해서 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를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떠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 줄 아십니까? ‘네 본토를 떠나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고대문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즉, 수메르라고 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도시 연맹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상업과 무역, 농업 등이 삶의 기반을 이루었고, 이방 종교의 세계관이 번성하여 그 세계관이 곧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시대 사고방식은 ‘운명론’이었습니다. 스스로 운명을 바꾼다든지 혹은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떠난다는 의미의 단어나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마치 우주 왕복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밀어내는 힘찬 로켓의 분사력 같은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네 족속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에는 개인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만 삶의 방향을 갖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사회의 안전망과도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지칠 때 가족은 매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종합해 볼 때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문화의 음성,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음성, 전통의 음성 등 안전을 보장해주는 음성을 뛰어넘으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받은 가나안 땅에 정보를 알고 있었겠습니까? 히11:8절에 보면 “갈바를 알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민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 부르심이 20대나 30대라면 설령 실패를 했다 하더라도 또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부르심의 시점은 70이 넘은 나이입니다. 그동안 갈대아 우르에서 자신이 쌓았던 모든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위대한 인물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탁월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났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익숙한 것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를 떠나보낸다든지, 부모님을 떠난다는 것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정든 고향을 등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익숙한 것으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속을 하십니다. 2-3절에 보게 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정처 없이 떠나라고 하시면서 더불어 놀라운 복을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의 통로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게만 하시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변화와 성숙에 장애가 되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주시는 좋으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그가 즉시 말씀대로 따랐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즉시 떠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1절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고 신약에서 행7:1-3절에 보면 이 당시의 사건을 스테반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메소포다미아는 바로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네게 보일 땅은 어디입니까? 약속의 땅-가나안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과연 이 말씀대로 순종을 했습니까? 물론 갈대아 우르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다 떠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본문 4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누가 아브라함과 동행하였습니까? 롯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달리,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창11:31절을 보시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어디에 머물렀습니까?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의 중간 지점인 하란 땅에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고향 땅을 떠나 하란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더 이상 고생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하란 땅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갈대아 우르에서 중간 지점인 하란까지의 길은 강줄기를 따라가기 때문에 물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고 평탄하기 때문에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하란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무려 480Km나 되는 먼 거리 일뿐 아니라, 길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막 길이었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험한 광야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고 꽤 오랫동안 하란 땅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고생되는 길로 가는 것을 주저한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익숙한 것들을 떠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조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또한 떠나라고 할 때, 곧바로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 지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나서 겪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은혜를 받을 때,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우리가 가진 그 결단과 헌신, 그리고 희생의 삶을 더 이상 하려 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처럼 익숙한 것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아십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하란>이라는 말이 “열매가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무는 동안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가 떠난 시점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 비로소 떠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말씀을 따르되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떠나야 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우여곡절의 삶을 신약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11: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여기 순종했다.” 참 놀라운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의 순종은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동기가 섞여 있어요. 회의도 섞여 있어요. 그러나 이 불완전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첫 걸음, 그리고 순종의 첫 걸음을 주님은 기뻐하신 것입니다.

전 이걸 보면서, 우리역시, 믿는다고 그러지만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 속에 회의도 섞여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순종 속에도 불순종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그리고 불완전한 순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순종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도 주님은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뭐, 어떤 사람은 믿는다면 깨끗하게 믿는다, 앗쌀하게 그냥 100% 확 믿고서 나간다, 이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이것은 극히 예외에 속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이 불완전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첫 걸음 그리고 순종의 첫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여러분, 이 걸음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요.

그래서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약속한 그대로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개인의 명예로운 축복을, 그가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영향이 온 세계 사람들에게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오시고 그리고 메시야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던 놀라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축복의 삶은 아브라함의 불완전했던 한 걸음의 믿음, 한 걸음의 순종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걸음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구 실험을 에디슨이 할 때 자, 드디어 전구 실험에 성공했어요. 그러나 그 전구가 얼마나 희미한지, 촛불을 밝혀야 볼 수가 있었던 것. 얼마나 재미있어요? 전구를 만들긴 만들었는데 촛불을 비춰 놓고 볼 수가 있었던 전구, 그러나 이것이 첫 걸음이었어요. 그 첫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들어 날렸을 때 그 비행기는 공중에 불과 12초를 머물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첫 걸음, 그 첫 걸음이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위대한 걸음의 첫 걸음. 불완전했지만 그 첫 걸음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스팀배가 미국 뉴욕에서 알바니아를 향해서 배가 나아 갈 때 뉴욕에서 알바니아까지 지금 배를 타면 천천히 가도 30분이면 가 요. 그 당시엔 30시간이 걸렸어요. 30시간. 그러나 이 최초의 첫 걸음에 그 스팀엔진의 고동소리와 함께 떠나갔던 배의 행진은 첫 스텝은 얼마나 중요했을까요?

인류 역사사상 최초의 자동차 실험 1 시간에 320m를 갔대요. 1시간에 320m. 그러니까 마차하고 가면 마차가 먼저가요. 자동차보다. 그래서 마차 타고 가는 마부들이 자동차를 비웃습니다. 내 마차나 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했던 그 불완전한 자동차의 시운전의 첫 스텝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여러분, 불완전해도 괜찮아요.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첫 스텝, 이 한 해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첫 걸음, 헌신의 첫 걸음, 봉사의 첫 걸음. 이 첫 걸음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날개를 점검해 보세요. 접혀 있나요? 아니면 펴져 있나요? 접혀있거나 찢겨 있거나 아니면, 날지 못할 만큼 망가져 있다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새롭게 날개 짓을 해보세요. 주님과 함께하는 그 희망의 날개를 펴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보지 않겠습니까? 이제 주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현장이 이번 부흥 집회입니다. 8번의 만남, 멋있죠? 우리 워밍 엎을 좀 해볼까요? 자, 다 날개를 펴 보세요!!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원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익숙한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생명 걸고 주님을 따르기 원하지만,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익숙한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의 인격을 갖춘 제자로 변화되고 성숙되기를 원하지만, 여러분들의 변화와 성숙을 방해하는 익숙한 것들이 있습니까? 과거의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들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습관들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을 변화되지 못하게 하는 익숙한 것들입니까?

그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선언하십시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때로 집을 떠나고, 사람을 떠나고, 익숙해진 도시를 떠나는 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그 익숙한 것들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익숙한 것들을 떠날 때, 여러분들에게 더 귀한 것들이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향한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멋진 변화를 향해 출발할 때,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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