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 롬14:13-23. 2020. 8/23
우리 교회는 코로나 19 확진 자가 점점 많아지는 지금의 어려움 속에 이번 주 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드리게 됨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빨리 종식 되도록 각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로마서 41번 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1월말이면 미국에 대선이 치루어 집니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재미난 평가가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현직 때 가장 무능하다고 평가 받은 대통령이 지미 카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마치고 이후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대통령을 꼽으라면 이 역시 지미 카터입니다. 지미 카터는 지금도 분쟁 지역이나 또는 가난한 나라의 기아로 고생하는 아동들에게 많은 돌봄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비타트 사역입니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입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며 일을 하는 카터에게 '일하는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한채의 집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빌딩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세워주기 위해서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했고, 이미 4절에도 연약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한바 있습니다. 여기에 쓰여진 '세움'이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 '오이코 도메'라는 단어인데 오이코는 '집'(home,house)이라는 뜻이고, 도메(도메오)는 '세운다'(build)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일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일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들에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의 태도를 통해 그가 세우는 사람인가 파괴하는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웃을 허는 자 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자이기를 원하십니까? 세우는 사람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합니다.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여기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 교회에는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었고,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 사이에 갈등과 불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업신여겼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갈등의 요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아무도 비판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날 두고 비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남으로부터 비판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 잘 하는 사람치고 남이 자기 말 하는 것 잘 견디는 것을 못 봤습니다. 전부다 히스테리컬 하게 반응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기는 재미있게 하면서, 남의 말은 못 받아주는,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니까 비판을 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비판이든 불건전한 비판이든 간에 비판하는 조로 말하는 것을 저의 본심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합니까? 나쁘면 나쁘다고 해야지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많습니다. 나와 너무나 다릅니다. 특이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아주 선명한 문제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나와 다른 관점과 의견, 나아가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사는 가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산다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배우자가 있다면 한번 물어 보십시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외칠 것입니다. 가족도 생각이 이렇게 다른 데 하물며 전혀 배경이 다른 교회, 직장, 사회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이럴 때, 나와 다르다고 비판을 해서는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바울은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이 문제를 돕기 위해 이런 예화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주초문제가 신앙의 수준을 정하는 규례처럼 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담배문제는 성경에 기록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혹시 어떤 교우들에게는 충격이 될지 모르지만 저 설교의 왕자로 일컬어진 스펄존 목사님이 골초였습니다. 한번은 심지어 그의 교회 근처의 담배가게가 선전을 하기를 "스펄존 목사님이 잘 피우는 담배를 파는집"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군가가 스펄존 목사님에게 전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면, 이제는 내가 담배를 끊을 때가 되었군요"라고 말씀하시더니 실제로 담배를 끊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상대의 신앙의 삶에 시험이 안 들도록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세상에는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가 될 수도 있고 죄가 안될 수도 있는 모호한 행동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모호한 것을 놓고 ‘아디아포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는 구별하기 힘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어떤 손잡이로 집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위해 나를 포기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강한 믿음입니다. 내가 포기되어지고 내가 주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세우는 것, 그것이 교회가 하나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상처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Ⅱ. 섬기는 자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18절에 사도 바울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칭찬을 받기 원하시면 섬기십시오. 여기 15절을 보세요.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 �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 바울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면 네 옆에 있는 그 형제나 자매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셔서 얻어진 열매’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함부로 하면 결국 그리스도를 또 한번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동 대학교 교수인 조준모 형제의 찬양 속에 베드로의 고백을 담은 노랫말이 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꿔주셨네. 십자가에서 그는 내 이름 바꾸셨네.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꿔주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원래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죄인이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아무 것이나 필요한대로 하던 창기였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창기였던 나를 영적인 주님의 신부로 바꾸어 주지 않았습니까? 고아였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친 아들로 바꾸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버려진 자에서 구원받은 자로 내 존재를 바꾸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울은 알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방탕하던 그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냥 받아줍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고 받아준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수준은 누구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태도가 그러해야 합니다. 따지지 말고 그냥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복음은 품는 능력입니다. 바다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넓어져야 됩니다. 작은 시내는 비가 오면 금방 물이 흐려집니다. 작은 호수는 조그마한 돌만 던져도 전체에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다는 웬만큼 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여름에 해운대 해수욕장에 애들이 수백 명 들어가서 오줌을 누어도 바다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과 원망이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치는 땅에 것을 움켜잡고 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Ⅲ.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왜 싸웁니까? 왜 다툽니까? 내가 속한 하나님 나라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17:14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받은 우리들은 더 이상 이 땅의 소유물을 움켜잡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세상에 속한 인생이 아닙니다. 단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남보다 더 우아하고 더 가지고 더 누리는 그것이 인생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먹고 마시는 문제에 매이는 세상사람들처럼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을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서면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지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주의 평강을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내 안에 세상에 것이 채워지지 않아도 기쁨이 일어납니다. 너무 예수가 좋습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분들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지도 빼앗을 수도 없는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해비타트운동 즉 사랑의 집짓기운동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본래 이 운동은 밀라드 풀러라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 없이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가 이혼선언을 하고 그에게서 떠나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돈이 전부인줄 아는 남편의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진지한 신앙을 찾기 시작했고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주의 클래런스 조던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을 방문하고 인종을 초월한 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옵니다. 그는 돌아오는 즉시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고 곧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 자동차, 보트, 자가용 비행기 모두를 팔아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졸지에 백만장자에서 빈 털털이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을 찾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수여 받고, 말틴 루터 킹 인도주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한 해비타트 관계자는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는 욕심을 버려, 하나님을 만났고, 물질을 포기하고 가치를 발견했고, 특권을 포기하고 행복을 얻었으며, 자신을 버려 이웃을 찾았고, 쾌락을 잃어버리고 영향력을 남길 수 있었다"고. 저는 이 말을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삶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희생, 그의 피 흘리심, 그의 섬기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과 저라면 이제는 우리가 이웃의 덕을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밀라드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가르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망치로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새삶을 체험한 그는 새로운 섬김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삶을 세워주는 일생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지미 카터가 사랑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집을 세우고 그들의 새 인생을 세워주는 일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세우기 위해 꼭 망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중보의 기도, 소리 없는 미소, 변함없는 관심-- 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이웃들은 새 인생의 집을 지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인생을 사모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