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15:1-7. 2020. 8/30. 주일 설교 롬41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담임 목사로서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삶의 현장에서 지쳐가는 여러분들에게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며칠 전에 한 가정에 심방을 하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우리 교우들 가운데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무거웠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최근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성도들이 직장에서 주변 동료들로부터 ‘당신 교회 다니지? 도대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래? 당신들이 국민 안전을 무시한 채 예배를 드림으로 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라는 말들을 자주 들으시면서 참 마음 고생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교회 학교 학생들도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비슷한 교회 비판을 듣고 우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교회 속한 것이 /마치 비양심적이고 몰상식한 것처럼 몰아가는 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서럽고 위축된 것 같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이런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오늘 저는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위로를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재 확산 되자 정부는 원인을 특정 교회 탓으로 돌리며 맹렬히 공격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예배 금지의 프레임에 갇혀서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물론 문제의 교회가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들은 정부 방역 지침을 철저히 지켜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치 모든 한국교회가 바이러스의 원산지인 것처럼 수펴 전파지인 것처럼 매도당하고 국민들이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정부와 여론이 몰아가는 것은 분명히 잘못 된 것입니다. 자꾸 언론에서 교회발 코로나 수도권 확산이라고 보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코로나가 교회에서 시작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물류센타발, 카페발, 마트발, 코로나 확진이라고 해야 합니다. 확진자는 죄인이 아닙니다. 누가 병 걸리고 싶어서 걸리겠습니까?
대부분의 국민들이 최선을 다해서 방역 지침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삶의 동선들이 겹치는 까닭에 피해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부도 국민들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믿어 주시고 어떤 특정 그룹을 희생양을 삼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따뜻하게 여론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부정적 시각을 가진 자들은 왜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교회들은 예배를 강행하는 가? 헌금 때문인가? 저는 이런 거친 비판들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서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이번에 청와대에 간 한교총 회장인 김태영 목사가 한말도 잘 못된 시각에 대한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사업장이 아닙니다. 세상에 헌금 때문에 예배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이 죄입니까? 세상의 눈에는 예배드리는 것이 모여서 커피 마시는 것보다 하찮게 여기는지는 몰라도 예배는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예배는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들이 만나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예배를 통해 타락한 인간이 변합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술과 여러 가지 잘못된 습관이 바뀌어 집니다. 그래서 건강한 인생, 건강한 삶으로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되게하는 놀라운 역사가 예배를 통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배의 힘입니다. 예배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대부분 예배드리다가 체포 되었습니다. 예배만 드리지 않았어도 살 수 있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생명같이 여기는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이기에 목숨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예배입니다. 사회 분위기가 아무리 반 기독교적으로 흘러간다 해도 우리는 생명을 걸고 예배를 지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우리가 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인 복음 앞에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마지막 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보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기도를 하셨지만, 그 기도 가운데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떠난다면 이들이 어떻게 이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저들을 보면서 눈물로 기도하신 내용이 요한복음17장에 나옵니다. 그 기도내용 중 가장 많은 부분이 “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왜 이런것들을 강조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과 최후의 소원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계 복음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를 감당해야 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계 복음화의 숙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동의하시겠지만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이질적인 집단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이는 대부분의 단체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창이다, 종씨다, 동향이다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등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 끼리 끼리 모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통적인 특성이 구성원들을 쉽게 어울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습니까? 자연적인 성향으로 볼 때 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부귀천이 확연히 나타나고 배운 분도 있고 못 배운 분도 있고 한데 모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 섞이기 어렵고 서로 밀어내기 쉬운 성질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맏음이라는 띠에 묶여서 모였기 때문에 가끔은 교회 안에서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함께 지내던 교우들 가운데 근 6개월씩이나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중한 형제입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신앙의 동지입니다. 엡4:3절에 보면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꼭, 지켜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 하나 됨을 위해 우선순위로 가져야 할 자세를 7절에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서 '받으라'는 말은 영어로 Accept라는 단어로 '용납하다', '접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납하고 서로 접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격도 없고 실수도 많고 허물도 많은 우리들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어느 누구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받아 주셨습니다. 접수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다른 사람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거부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주님 안에서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난의 때일수록 성숙한 향기를 발할 때가 아닙니까? 교회가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함께, 서로 서로 문제를 끌어 앉고 당당히 맞서십시오. 여기 바울은
Ⅰ. 연약한 자를 담당해야 합니다. 1절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 '연약한 자를 담당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담당한다는 말은 원어로 '바스티조'라는 말로서 '짊어진다,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공원 같은 데를 가서 보면, 나무를 옮겨 심고 나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보조 막대기로 나무를 지탱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바스티조'입니다. 이번에 ‘바비’라는 초강력 태풍이 불 때, 나무들을 밧줄로 묶지 않습니까? 여기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말씀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내 약점으로 알고 그대로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에 불과한 것 같은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은 함께 하면 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함께 하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무시무시한 로마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함께 정신’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담당해 나갈 때, 고난이나 핍박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Ⅱ. 서로 기쁘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2)1절과 3절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또한 2절에는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자의 강한 의무입니다. 모든 일에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남의 이름을 높이고 바로 그것이 행복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어떻해야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눅10장에 보면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거반 죽을 만큼 맞고서 길에 버려졌습니다. 옷까지 빼앗기고 죽게 될 정도로 매를 맞은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 현장에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모습을 보았지만, 황급히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상처를 싸메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까지 가서 치료의 손길을 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누가 이웃인지 찾지 말고,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인지 따져 묻지 말고 네가 그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Ⅲ. 서로 인내와 안위로 대해야 합니다.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로마교회가 좀 더 성숙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서로 인내하고 안위 즉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오래 참아 기다려 주고, 고기를 못 먹는 자들은 먹는 자들을 이해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기다려 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을 소개할 때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격 려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격려를 누가복음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 올 때 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향하여 오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둘째 아들이 집을 찾아 돌아 왔을 때 새 옷을 입히시며 한없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찬317장 (2절)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예수님의 마음은 오래 참으심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을 끝까지 격려하시는 마음입니다. 심지어 자기를 배반한 가룟 유다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자기를 팔 사람인 줄 알고도 여전히 잘 대해 주셨습니다. 또한 자기를 팔 댓가로 은30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온 유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며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끝까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차라리 나지 않아더라면 너에게 좋았을 텐데 라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한번도 분을 품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오래 참고 격려하면서 서로 하나 되기를 힘씁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 세계적으로 신종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코로나19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이는 매우 두렵고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가뜩이나 예배를 한 두 주간 드리지 못해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일어나는 데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국 면역학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마크 월포트 박사가 BBC 인터뷰에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인류와 함께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며 “독감처럼 정기적으로 접종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다시 통제 불능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 코로나로 인해 우리 국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생겼습니다. 전체적으로 하면 우리 국민의 약 80% 가까이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39%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문화 속에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강한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더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이후로 비대면(Un-tact)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교회의 모임이 힘을 잃거나 의미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여서 찬송하고,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교제하는 일들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코로나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는 침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무거운 질문 앞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아무리 힘든 시대이지만,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해버린 시대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 때 사람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려도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아야 하고,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아무리 많은 것들이 변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때 이 힘든 시간들을 반드시 이겨나갈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