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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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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 고난의 현장에서 (롬15:14-2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9-06 | 조회: 489
고난의 현장에서 롬15:14-21

 

최근의 어는 기관에서 코로나 불루라고 하는 이 코로나 19에 관련된 우울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 가슴 아프게도 무려 71.6%가 ‘지금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국민 3명 중에 2명이 마음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장기화가 될수록 여러 가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가슴 아픈 통계입니다.

 

저 자신도 사실은 목회자로서 지난 몇 주간에 굉장히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느끼는 경험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이상이 없는데 이제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 릴 수 없고 또 성도들이 주중에 자기 교회를 출입할 수도 없고 이런 것들이 저를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방역 수칙을 지키고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이 상황이 제 마음을 너무도 위축시키고 또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 이런 생각 앞에 한 없이 무력해 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텅빈 예배당에서 감정 조절도 안되고 허공을 바라보며 설교하는 제 모습 앞에 고통이 와 닿았습니다. 그러면서 질문 하나가 생겼습니다. 2년 동안 이 로마서를 주일 낮 예배 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삶에 얼마나 적용을 하고 사는가하는 노파심이 있습니다. 로마서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은 사람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듣고 안 들은 차이입니까? 로마서 강해를 들었는데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사실 매우 힘든 상황 속에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서약한 자객이 40명이나 됩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헌신했다 할찌라도 주변의 만류가 있고 그 길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이라면 누가 선뜻 길을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15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은 왜 자기가 로마서신을 썼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이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다시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는 아주 뜨겁습니다. 구원이 감격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의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미지근해지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로마 교회도 복음을 받아 들인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이들의 삶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모습으로 점점 교회가 타락의 길로 은혜가 메마른 교회로 변질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 가지를 그렇게 원했고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롬13:13-14절에서 외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바울이 강력하게 권면한 내용을 보면, 로마 교회도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도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느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신앙이 살아 있는지 죽어 가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있고, 찬송하고픈 열정이 있으면 우리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감동이나 믿지 않은 영혼을 보면 불쌍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봉사할 때면 마음에 기쁨이 있고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뭉클함이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생명이 사라지면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찬송하고픈 열망도 없고, 복음을 전하고픈 감동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맨송맨송합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주일이 다가오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교회에 가긴 가야 하겠는데,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억지로 교회당에 나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영과 우리의 신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본문에서 외칩니다.

 

Ⅰ. 나는 예수의 일꾼임을 고백합니다.

16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까?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일꾼이나 복음의 제사장이나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여기 제사장의 할 일은 제사 지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물 없이 제사를 드릴 수 없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무엇이 제물입니까?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아직까지 듣지 못한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비전은 복음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아직까지 듣지 못한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일꾼으로서,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불신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것을 생애의 일관된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예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벤허’란 영화에 보면, 노예들이 거기에 쇠사슬로 묶여서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젓는데, 배 안에서 젓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어느 지점에 왔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신호에 맞추어 노를 젓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가리켜서 ‘휘페레타스’―‘일꾼’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경우, 배의 목적지는 선장이 알고 있을 뿐, 어디로 가느냐고 묻거나  밖을 내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노를 저으라면 젓고, 멈추라면 멈추며, 빨리 저으라면 빨리, 천천히 저으라면 천천히 저으면 되는 이것이 바로 ‘휘페레타스―일꾼’인 것입니다!! 일꾼은 ‘주인이 맡겨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준 일을 놓고 “왜 이것을 하라고 합니까?” 하는 따위의 다른 이야기는 일꾼으로서의 할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주인이 새끼를 꼬라고 하면 꼬고, 나무를 하라고 하면 나무를 하는 것이 일꾼인 것입니다.

 

Ⅱ. 주의 일꾼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이어서 사도 바울은 주의 일꾼의 자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의 일꾼 되었다고 아무렇게나 사역을 해서는 안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사실 바울처럼 자기를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다 자랑거리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가 복음증거자가 된 이후로 일으켰던 수많은 기사와 이적들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이 왜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한지 아십니까? 자신의 약함 속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여 그 능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렀다.’(고린도후서 12:9)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주인이 바뀌면,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시는 삶을 살면 연약한 내 안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약할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됩니다.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확신하고 그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Ⅲ. 주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축복을 이야기 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영적인 권세를 주십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전도를 하면 오히려 내 믿음이 자라납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능력이 없어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재주가 없어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하면 할 말을 알려주십니다. 전도를 하면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전도를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십시오. 복음 전파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방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19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부터 오늘의 날의 유고 땅인 일루리곤까지 나아갔습니다. 그에게는 능력이 없었지만,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태신 자를 작정하기로 했는데 코로나 19에 묻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거 그냥 멈추면 안 됩니다. 지금 세상이 교회에 대한 곱지 않는 시선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고 불신자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시고 다시 태신자를 세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학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 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이 열정이 먼저 믿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요즘 영끌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부동산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영끌이란 말은 영혼까지 끌어 모아 돈을 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30대가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부동산 값이 너무 올라 집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다급한 마음에 부동산매입에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제재를 가하니까 주식 광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통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겨 영끌을 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영끌을 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편법은 물론이고 불법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을 미칠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 19라는 광풍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그렇게 당당했던 인간의 모습이 허무할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인간의 교만이 너무 허무하게 눈에도 안 보이는 바이러스에게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이 현실에서 확인하는 가슴에 사무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별 수 없는 인생!”입니다. 이제 인류는 백신도 중요하고 치료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와 회개하고 하나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해도 최근 코로나19사태 이후 미국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이 신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글검색을 살펴보면 ‘믿음’, ‘하나님’, ‘기도’와 같은 내용이 급증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퓨 리서치(Pew Research)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55%가 코로나19확산을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기도를 전혀 하지 않던 사람 15%와 심지어 비기독교인 24%도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CBN 뉴스를 보면 코로나19사태 이후 성경판매가 크게 늘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비해 금년에 틴데일 성경은 3배, 알라바스타는 134%, 그리고 라이프웨이는 62%가 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19사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거나 영적으로 나태해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해 줍니다.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것을 회개하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해 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줍니다.  코로나19사태를 맞아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이요,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일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꾼은 아직까지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나아가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전하기 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이 일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고 싶어도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복음은 하늘의 천사도 흠모할 만큼 귀한 일입니다. 믿지 않는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이 귀한 일을 하셔서 주님께는 기쁨을 드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전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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