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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3 거인의 발자국 (롬15:22-2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9-13 | 조회: 417
거인의 발자국 롬15:22-29. 2020. 9/13 주일 설교


얼마 전에 EBS 방송국에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근처에서 야영을 하며 호랑이를 6개월간 촬영하는 가운데 PD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노련한 사냥꾼은 발자국 하나만을 보고도 많은 것을 안다고 합니다. 발자국을 보고 그 자국을 남긴 사람이나 동물의 특성을 금방 압니다. 사람의 경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를 아는 것은 기본이고 이 사람의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걸음걸이가 어떤지, 몸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빨리 걸어갔는지, 언제 그 자리를 지나갔는지 까지도 안다고 합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발자국 하나만 남겨도 이렇게 전문가는 판단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남기고 간 발자국들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화려한 발자국을 찍은 사람들, 인간의 잣대로 거인(巨人)이라고 평가된 사람들은 자신의 야망과 권력과 재물 과 인기로 열심히 발자국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바닷물이 몰려오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영원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그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거대한 피라밋을 세우고 영원한 제국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피라밋마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스스로 세계를 지배하는 거인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거인을 꿈꾸던 그의 몸부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수많은 여행객들의 발에 짓밟히는 구경꺼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한 믿음의 거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신이 아무리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 그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나 바울의 바울 됨은 정말 그의 삶 속에 예수가 그대로 드러날 만큼 그의 인격과 그의 삶의 방향, 그리고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이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이 한사람의 영향력이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가 부름 받아 일할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포악한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핑크라는 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만 죄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사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모험입니다.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희망도 기쁨도 생명도 없는 곳, 영원한 멸망만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영향력을 미치고 살아야 할 현장, 사명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오고 오는 시대에 우리 성도에게 보여 주는 삶의 영향력은 그의 자세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믿음으로 감당하길 바랍니다.

 

Ⅰ.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입니다.

22절에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여기 “여러 번 막혔다” 이 말은 여러분 시도를 했지만, 장애물을 넘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1:13절에도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지만, 엄청난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일을 만나면 이게 주의 뜻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정도면 그만 내려 놓을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불붙는 것 같은 뜨거움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어린 마음입니다. 그의 마음에 이 복음을 증거하려는 것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가 없어 길이 막혀도 그 앞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려고 해도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이 나를 격동시킵니다. 그래서 도저히 세상과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유혹이 아무리 달콤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죄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가 가진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가서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간절한 꿈입니다. 이 아침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여러분은 어떤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만한 꿈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동안 계속해서 달려갈 비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아깝지 않은 그런 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오늘날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비전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을 거머쥐고 살아도, 비전이 없는 삶은 매우 불행한 삶입니다. 한 생을 살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살까, 어떤 꿈을 이루어볼까 하는 생각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꿈을 먹고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Ⅱ. 그의 삶은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23-24절본문 23-24절 말씀에 보면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바나는 오늘날의 스페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스페인을 문명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 된다고 포기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자! 바울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에 가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보지 않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시 로마 성도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기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다시 로마 교회에서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그 당시의 땅 끝으로 여겨졌던 서바나,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으로 자신을 파송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는 한길 바른 길로 그는 살아갔습니다.


정말 정신없이 복음을 위해 한생을 바친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쟁이, 말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설명해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을 바쳤고 다른 사람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온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 20: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귀중한 생명을 바칠만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하나만 있어도 남부럽지 않을 것을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기 단 하나의 생명을 드릴 수 있었던 사람. 노년의 그 혹한기에 외투 한 벌이 없어 추운 겨울을 지냈던 사람, 오히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한분, 그분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나는 종입니다. 나는 종이라는 것을 자랑했던 그 바울이 그립지 않습니까? 여러분, 진지하게 십자가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내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일어난 현상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매우 심한 거부감입니다. 어떤 형제가 입사면접을 보는데 ‘당신 종교가 무엇이냐?’ 그 질문의 의도는 기독교라 답하면 취업을 하지도 못하겠다는 두려움이 밀려오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자랑스러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십자가 안에 우리 인생에 모든 해답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온 세상에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는 이 최선의 삶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Ⅲ. 자기 관리입니다.

본문 25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모교회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로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그의 신실한 동역자들을 통해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은 멀고, 또 주위에 바울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바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행을 감행하고 있습니까? 그가 예루살렘에 가고자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당시 큰 흉년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가 너무 형편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비록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더니 저들이 최선을 다해서 분에 넘치게 정성을 보아서 헌금을 보냈습니다. 이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형편이 남아돌아서 헌금한 게 아닙니다. 극한 가난이 그들의 삶을 덮어도 기꺼이 헌금에 동참을 했습니다.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기회가 주어지고 내 마음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사용하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없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라고 하시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시간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적 여유를 주시고, 때로는 재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IMF때 우리 교회는 사랑의 쌀 운동을 전개해서 당시 어려움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목장이나 기관을 돌아보고 자녀를 둔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지 살피고 최선을 다해 함께 어려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홍수와 태풍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도 사랑의 손길이 펼쳐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렵다고 움켜쥐고 살면 안 됩니다. 지난 날 태안반도에 기름유출 때 우리 교우들이 현장에 가서 작지만, 헌금을 드리고 시꺼멓게 변해버린 돌하나 하나를 하루 종일 문지르며 힘을 썼습니다. 섬기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 - 자신의 영적인 점검과 새로운 영적 충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재충전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의 선교행적을 추적해 보면, 한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항상 베이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점검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를 살피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고전9:27절에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자신이 숱한 주의 일을 한 것 사실이지만, 이것이 자칫잘못하면 자기 의가 되고 남을 무시하는 교만이 되기 때문에 늘 자신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고전15: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 점검입니다. 이번 코로나 19가 잠잠 해 지면, 오히려 교회가 믿음이 견고해 지는 은혜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교우들 가운데 한사람도 쭉정이나 가라지가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곡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흐르면 좋은 제도도 낡아집니다. 영원한 기업도, 영원한 제국도, 절대 권력도, 영원한 부도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세대가 그토록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 세웠던 교회가 백 년도 되기 전에 문을 닫고 상가로, 술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100년 이상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았던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만 해도 불과 30-40년 전에 최고라고 했던 교회들이 지금은 힘을 잃은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앞선 세대의 신앙의 뜨거움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신앙의 전수가 우리에게서 희미해지면 다음 세대에서는 훨씬 더 옅어질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내 신앙은 손자 대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손자에까지 그 신앙이 아름답게 계승된다면 명문가정이 됩니다. 그 가정에서 역사를 움직일 인물이 나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삶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습니까? 세상의 야망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왕국을 꿈꾸는 자는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순종의 사람들은 당시에는 초라해 보여도 영원히 기억되는 거인의 발자국이 찍혀집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에 원하시는 진정한 거인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비록 작고 부족해도 내게 주심 주님의 은혜를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여러분의 그 발자국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지게 될 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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