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가 무너지면 롬15:30-33. 2020. 9/20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이 평안이라는 단어도 점점 낯설게 여겨질 만큼 지금 우리는 너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서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방역당국에서는 지금의 이 시국을 비상사태를 넘어 전시상태와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큰 위기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문제뿐만 아닙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오는 여파가 만만치 않습니다. 전세계적으로 218개국에서 확진자가 3000만명이나 되고 사망자도 100만이나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을 선언했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인력으로 코로나19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데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공식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글로벌 경제의 침체 등 지구촌 구석구석이 위기상황에 이르렀음을 경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세계 최고의 과학과 의학을 자랑했던 우리는 이 조그마한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이나 치료제를 아직도 개발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과 절망의 먹구름이 언제 가실지 모르는 자리에서 우리는 나름 자신이 추구했던 각자의 ‘인생의 터’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터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붙들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젊음을 오직 고시원에서 보내며 수차례 실패 끝에 사법고시를 붙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입고 있는 법복이 그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터입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그 어릴 적 가난을 극복하고 아파트와 부동산, 그리고 주식 등으로 제테크로 인해 그 분야에 고수가 되어 매월 수 천 만원의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사람은 그것이 그 삶의 터일 수가 있습니다. 또 건강일 수 있고, 한 분야에서 꾸준히 평생을 노력해서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결과를 인정받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그 학술적인 명성과 이룬 성취가 그 인생의 터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의 삶을 걸고 살았던 그 터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망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뭔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의욕을 갖고 뭔가를 하려고 해도 해 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동안 추구했던 삶의 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4000억원의 비자금을 횡령하였을 때, 그 돈을 표현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설명하는 가운데 매일 1억을 써도 500년을 써도 못쓰는 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철장으로 가고 나라의 환수금으로 모든 것을 잃을 때, 분명 그 움켜잡았던 것이 무너지는 것, 그것, 인생의 터가 무너진 것입니다. 애플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었던 스티브 잡스는 아마 천년을 매일 1억씩 써도 남을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건강의 터”를 지켜내지 못하고, 췌장암의 무서움을 전 세계에 알리고, 인간의 의학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나이 40대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사고들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그 속으로 함몰 될 때도 있습니다. 또 공사를 하다가 옆에 있던 집들이 기울어서 무너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때는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기도 하고 전기가 끊어져서 정전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충격을 주기도하고 그렇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거나 무너뜨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대체할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코로나 19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 앞에 우리 크리스찬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거센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앞에 어떤 태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11:3절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하는 말씀이 한 주간 내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기본이 무너지면, 기초가 무너지면 우리 성도는 무엇을 할꼬 하는 탄식입니다.
지금 계속 보는 이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그 삶의 터가 흔들리는 것을 겪었습니까?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이 정도면 인생의 터가 무너지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주의 일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살았던 그였지만, 그의 삶의 터가 얼마나 흔들렸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그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힘입 니다. 그는 기도의 줄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바울이 그 많은 사역 가운데 기도가 없었다면, 그의 삶의 터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명의 터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Ⅰ. 기도 - 그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여기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 - 여기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라는 말은 ‘죽을힘을 다하다’라는 일사 각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든지 살전 5: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명령합니다. 부탁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필그림 하우스의 맞은 짝에 보면 가평 루디아의 집에 간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랜 세월 섬기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엔 과거에 아나운서로도 유명했던 지금은 실명을 한 서천석 원장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엔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곳입니다. 뇌성마비로 중중 장애자로 사는 50여명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엔 방마다 중증 장애자로 1급과 2급 지체자들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한 분과 간호사들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방을 들어서는 순간 아이 하나가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호흡 곤란이 온 것입니다. 주로 여기 온 중증 장애인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근육 무력증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근육 무력증이 무서운 것은 호흡기능이 점점 약해져서 호흡관이 좁아지고 또한 폐가 오므라들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죽어가는 현대 의학으로 고치기가 너무 힘든 병입니다. 당사자는 물론, 그 옆을 지켜보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고통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흔히 기도를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 으로부터 공급받는 신비한 통로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영적 노폐물, 죄악의 노폐물을 바깥으로 빼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받고, 내뿜는 이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적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기도이기에 엔드류 머레이는 기도가 ‘하나님의 여과 장치’라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여과장치를 통해 내 욕망, 내 이기적인 것이 다 걸러지고 하나님의 뜻만 걸러져서 나온다. 맞는 말입니다. 늘 기도하세요. 루터 하루에 두 시간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나는 마귀에게 지는 패배하는 생활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Ⅱ.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30절에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중보입니다. 칼빈은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 왕이 기독교 지도자들을 없앰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장면이 나옵나다. 그는 특히 야고보와 베드로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죽였지만 베드로는 죽이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베드로의 경우 그가 옥에 갇혔을 때 행12:5절에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목숨을 건졌고, 오히려 헤롯왕은 충이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행12:23). 베드로 자신도 기도했겠지만 성경에는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베드로를 구원해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8-20절 말씀에는 보면 중보기도의 중요한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딤전2:1절에 ‘도고’라는 말을 씁니다. 이 ‘도고’라는 말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 기도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적으로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점차 사회적 거리두기의 문화가 확산되면 신앙에도 분명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만남의 장’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고,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혼자서 찬양하는 것보다 함께 모여 찬양하는 것이 더 좋았고,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는 것도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19로 인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만남이라는 개념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교회는 신앙을 지켜야 하고, 신앙교육을 해야 하고, 신앙을 전승해야 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변화된 삶의 패턴에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외친 것처럼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이 중보의 장을 열어놓고 목장이나 기관이나 교회학교가 카톡방을 열고 중보 기도에 힘을 써야 합니다.
Ⅲ. 나를 위하여
바울은 그에게 닥칠 위험으로 그의 선교 계획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기도 부탁을 한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31절에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여기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란 지금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 유대 지역에서 바울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참 힘든 사역의 길입니다. 그리고 ②. 또 하나는 32절에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이 말은 바울도 연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간 사역의 현장이지만, 얼마나 사명의 터가 흔들릴 일이 많았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고난의 파도는 점점 거세져만 갑니다. 왜 인생의 터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우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 /span>심지어 로마에 와서 감옥에 갇혔을 때도 엡6:19-20절에 보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31-33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 가는 길에 막힘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온 땅에 펼쳐 지기를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가 소중했으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까?
지난 월요일에 극동방송에서 이번에 나온 강해적 대지설교에 대해 방송을 했습니다. 담당 pd가 목사님 설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습니다. 한 평생을 이 강단에서 설교를 해왔지만, 여전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 설교입니다. 한편의 설교가 나오기 위해 여러분,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지 모릅니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텅빈 예배당에서 감정 조절도 안된채 말씀을 전하면서 과연 성도들이 이 설교를 제대로 듣기나하나? 그리고 정말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늘 제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이 한편의 설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인가를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제가 가을이 되면 좋아하는 꽃이 국화입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쓴 ‘국화 옆에서’를 되새기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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