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라 시122:1-9
어떻게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추석은 우리나라 명절 가운데 가장 기쁜 명절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서 이 한가위가 가장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급적 고향이나 친척을 만나는 일보다 가족끼리 명절을 보내기를 당부하는 취지에서 많은 분들이 조용한 추석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코로나 때문에우리는 너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서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통령인 트럼프도 양성 반응이 나옴으로 앞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미 대통령의 대선 정국이 어떻게 될지 격량에 휩쌓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전쟁터와도 같은 세상을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고 계십니까? 일상의 삶이 멈추고 우리는 거의 아홉 달 가까이 너무나도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들마다 국경이 봉쇄되고, 어떤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이동조차 제한했습니다. (몽골) 병원에 계신 부모님들 면회도 인되는 정말 힘든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교회도 8월 23일부터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여러분에게 9월 20일부터 제한적이지만, 예배를 드린다는 문자를 발송했습니다.
이 아침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한 동안 영상으로만 예배를 드리다가 이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문자로 받아보셨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셨습니까? 아마도 어떤 분은 ‘아직도 조심스러운데...’라고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교우들은 ‘이젠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에 설레는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 예배당에 모이지 못하고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나에게 교회란 어떤 존재였는가?’를 한번쯤은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예배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우리가 함께 대하는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순례의 마지막 코스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여기서 그들은 삶의 의미와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의미와 기쁨의 소망을 위해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치루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같이 명백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소중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건강하고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영광스런 교회생활의 비결은 무엇입니까?Ⅰ. 성도는 교회를 향해 열린 감정으로 반응해야 합니다(1-3절).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는 말씀은 엄청난 기쁨의 노래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흐르던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라고 하는 그 한 마디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기쁨이 있으셨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예배당은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예배당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오고 싶은데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배당에 다시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당에 나오시면서 여러분에게 감격이 있으셨습니까? 그동안 예배당에 오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며 이 자리에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배는 정말 중요합니다. 단순히 예배당에 오고갈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는 기간에도 우리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가정에서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렸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도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나마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 같은 감격으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은 분명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그렇게 기뻐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똑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분명 예배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으며, 우리는 감격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배당에 나올 때에 우리는 집에서 예배드릴 때보다도 더 감격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곳은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그 동안 우리가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경험했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배당에 모이면서 우리는 다양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거룩한 백성들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의 역사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나누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사명들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어가는 전초기지가 바로 교회당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다음 세대를 양육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연합된 힘으로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구제나 선교사역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건 교회당에 모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 사명을 재확인하고, 그 사명을 이루어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함께 이루어갈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과 연합하고 연대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한번 잘 드리고 나면 내 영혼 가운데 있던, 어두움의 그림자, 패배감이 사라지고 승리감이 충만하여 내 속에 있던 죽음의 세력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자!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그 현장 앞에서 그들은 어떤 감격이 일어났습니까?
2절에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쉽게 설명을 드린다면 제가 2002년에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 우리 교회 성도 한분이 부산 구덕 경기장에서 열리는 한국대 폴란드 입장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기차를 타고 그 보고 싶었던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흥분과 충격에 휩쌓였습니다. 경기장 안에 관중들이 꽉 들어차있고 연신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오늘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그토록 그리던 예배,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 올 때, 그 상항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8개월 만에 또는 몇 달만에 처음 예배당에 발을 내 딛을 때, 저를 끌어 안는 분도 계셨습니다. 여기 저기 보고 싶은 성도들이 눈에 들어 올 때, 그 기쁨을 아십니까?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예배에 오면 찬양과, 말씀,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어떤 분이 예배의 감격을 대해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습니다. 저처럼 어릴 때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바닷가가 주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추억들이 많습니다.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다 빠집니다. 옛날만해도 바다 밑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물이 다 빠지면 물 밑에 있던 바닥이 다 드러납니다. 거기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습니다. 바다 조개, 고동, 해파리, 성게, 미역 등등. 그런데 요즘 바닷가는 너무나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다 빠져나가면 고무신 짝이 돌아다니고, 나무 조각이 사방에 널려 있고, 죽은 성게, 중독되어 이상하게 죽은 물고기 등 지저분합니다. 그러다가 밀물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점점 물이 많아지면서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나중에는 물이 해안가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썰물 때 보았던 바다 밑에 있던 온통 더러운 것들이 싹없어집니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풍요로운 물결과 파도소리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배라는 의식을 행함으로 밀물과도 같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에 나올 때만 해도 세상에서 고생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마음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 상처도 많이 입고, 여러 가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범한 죄로 영혼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잡동사니를 마음에 안고 그대로 예배에 나옵니다. 대부분 예배드리러 나오면 "주님, 지난 한 주간 잘 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고 회개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썰물 때 물이 빠져 나간 후의 더러운 바닷가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면, 하늘로부터 밀물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밀물이 우리 마음을 덮고는 그 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쓸어내 버립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근심걱정이 조용히 물러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은혜가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Ⅱ. 예배의 생명은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5)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여기 ‘판단’이란 뜻은 “사태를 바로 잡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공포의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죽은 예배와 산 예배,/ 거짓예배와 참 예배,/ 받으시는 예배와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작부터 마지막가지 예배의 모든 순서를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생각을 갖고 예배를 드린다면 훨씬 지금의 예배와는 다를 것입니다. 또한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마음이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드릴 것입니다. 시51: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요한복음 4: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관찰하시고 살피시며 판단을 하십니다.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지, 거룩하고 성결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지를 평가하십니다. 예배는 전인격적 행위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예배답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고 그 예배에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집중력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까?
Ⅲ. 평안의 회복을 주십니다.
본문 6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해야 합니까? 가장 먼저는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언제든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그 샬롬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 6-8절에 한 번씩 모두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그러면 평화를 떠올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화를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평화가 깃들인 곳이요, 세상에서 힘들고 지친 영혼들이 이곳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 중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한 시간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다 잊고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여 하나님께서 감싸주시는 평안을 느끼는 시간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며,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시간이 바로 예배의 시간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불안한 마음과 강요를 통해 스트레스를 주지만, 하나님의 품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줍니다. 그것을 얻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압박을 주어 우리로 정신없이 달려가게 만들지만, 참된 쉼터이신 예수님의 품에는 쉼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배당의 문이 닫히면서 우리는 그런 참된 안식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그런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노래한 이유는 그가 예배를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사모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올 때에 너무 기뻐서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다윗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했고,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사모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도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통하여 코로나19로 힘들었던 우리의 마음에 하늘의 평강으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총을 깊이 경험하여 아직도 힘든 시기를 믿음으로 이겨나가십시다. 예배의 감격, 예배의 은혜를 회복하여 시은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며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나가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에게 가장 축복된 선물로 교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인 교회를 통해 삶의 의미와 기쁨을 누리며, 영적인 능력을 얻어 가정과 직장과 이 사회를 새롭고 건강하게 세워 나갑시다. 교회의 평안을 위해 힘써 기도하며, 성도들 간에 만남의 축복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이 분명한 교회생활을 해 나감으로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인 동성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교우들이 단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할 일 많은 우리시대에 세상에 수먾은 도전이 와도 흔들림 없이 사람을 세우고 세워진 사람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격조 높은 교회 안디옥교회처럼 지역사회와 우리나라에 복을 주는 교회로 우뚝 섭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웃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로 자리매김 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