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이 흔들릴 때 시16:8-11. 2020. 10/25
차이코프스키의 유명한 발레극 <백조의 호수>에 보면 여성 발레리나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발레 기술인 ‘32회전 푸에테’가 나옵니다. 가냘픈 몸매의 여성 발레리나가 한 다리로 발끝을 들고서 몸을 지탱하면서, 또 다른 한 다리를 높이 들고는 지탱한 다리 주위를 휘저으며 32회전하는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과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서른두 바퀴를 돌면서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고난도의 기술을 소화해내는 것도 감탄스럽지만 32회전을 하면서도 몸의 균형을 잃지 않은 균형 감각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발레리나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에 대한 어느 분의 설명을 듣고서 머리가 끄덕여졌습니다.
발레리나가 회전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중앙에 있는 관객 한 명을 골라 그를 응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몸이 회전할 때 손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신체가 돌아갈 때 얼굴은 끝까지 그 사람을 응시하다 제일 마지막에 돌리고, 다시 몸과 손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를 먼저 돌려 다시 그 사람을 응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32회전을 하는 내내 중앙에 있는 그 ‘한 사람’만 응시하는 것이 넘어지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19 여파 때문에 여기저기 우리가 버팀목처럼 여겨졌던 것들이 흔들리며 무너지는 안타까운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가을의 깊은 맛이 단풍인데 그것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여유조차 없이 살아갑니다. 오늘도 자고 일어나면 들리는 소식은 어둡고 우울한 소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십년 동안 일구워 왔던 사업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취업의 문은 꽁꽁 얼어붙고, 어디 나돌아 다니지도 못한 채 우울증 환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도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는 상황 속에 빠진 다윗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한때 저 시골의 목동으로 누구하나 눈길을 주지 않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불레셋 장수인 골리앗을 돌맹이 하나로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당시 사울 왕의 사위가 되는 자리에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신분 상승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위기를 만납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가정을 버리고 자기가 사랑했던 땅을 떠나 이방 족속의 지역인 불레셋의 지경에 들어가 망명의 설움을 달레며 살아갑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성난 사지같이 달려듭니다. 사울 왕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고 힘든 삶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은 왕입니다. 왕은 엄청난 권력이라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할 정도로 군사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전혀 군사 훈련도 받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변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말 그대로 ‘오합지졸’로 모인 600명의 사람들이 전부였습니다. 그 600여명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윗이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 왕에 비해서 다윗이 가지고 있는 힘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8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위기 가운데서도 자기는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변의 문제 때문에 무너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특히 본문의 배경은 사울왕의 끈질긴 추격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이 시편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다윗의 모습 속에서 신앙적인 위기관리의 비결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Ⅰ.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급한 부르짖음입니다. 여기 1절에 ‘나를 지켜달라,’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그는 단순히 현실만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더 이상 사울 왕이 통치하고 있던 유다 땅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 다윗은 블레셋 땅 가드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그곳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자기들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원수라고 해서 다윗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는데, 그곳에서 잡히지 않고 도망쳐 나오기 위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시편 40: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라는 말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가득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를 내어 우리의 상황을 아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상황 속에 그대로 놔두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곤고한 상황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나를 건져 주시라’고 나를 지켜달라고 소리를 내어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곤고한 중에 부르짖는 기도는 내 어깨에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68:19절에 보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는 말씀처럼 내 인생의 짐을 져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빌립보서 4:6-7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전히 우리의 삶에 염려와 걱정이 밀려온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염려스러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꿔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짐을 대신 져 달라고 기도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어깨와 등에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짐을 지고 가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짐을 짊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게 되고, 보다 겸손하게 살게 됩니다. 때로 우리 어깨에 있는 그 짐이 우리로 하여금 거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살지 않고 세상을 거스려 살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위기의 한 복판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Ⅱ.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성경에 ‘오른쪽에 계신다’는 말은 성경에 보면 오른 쪽은 힘을 상징합니다. 내게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큰 힘이 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위기 속에서도 늘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보다 더 귀한 사실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낙심되고 곤고한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앞으로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사십시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때로는 우리의 삶에 어떤 힘든 문제가 닥칠지라도,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손을 꼭 붙잡으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여기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저앉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사랑하는 동상의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모진 비바람을 이겨낸 결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의 인생길 어찌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흔들리는 순간마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십시오. 바로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하십시오. 흔들림 속에서 인생의 꽃은 더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가 찾아오면 흔들립니다. 마음이 약해집니다. 원망하고 누군가를 탓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결국 그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을 실패하게 됩니다. 성도는 그 위기 앞에서도 주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 인생의 흔들림의 순간은 바로 나의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훈련의 시간임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흔들림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바로 그 흔들림의 시간은 저주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가시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가 흔들리지 않은 것은
Ⅲ. 현실너머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 임이니이다 ” 여기 ‘버리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신학적으로 ‘견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번 택한 자를 절대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책임을 지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지금 위기 가운데 있지만, 나를 흔드는 숱한 문제 앞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이 위기 가운데 자신을 버리시거나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기쁨을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 11절은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환란 중에도 즐거워합니까? 지금 다윗 앞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상항은 계속 자기를 흔들고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 구절은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아프지도 않고, 암에도 걸리지 않고, 사업만 시작하면 다 잘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당장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여전히 문제가 많고 우리 삶에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환란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면죄부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을 보면 예수를 믿는 순간 환란과 핍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환란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비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여기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 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환란보다 더 강력한 미래의 영광이 나를 사로잡을 때, 비록 환란 속에 있고 그 환란 자체가 고통과 어려움을 주지만 그럼에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이 상황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고 내 눈을 사로잡고 있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지금은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먹구름 사이에 빛줄기가 내리쬐고 조금만 지나면 그 먹구름이 지나가고 찬란한 태양으로 가득 차게 될 소망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런 소망 없는 내가 누군데 도대체 내가 누군데 그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마다하지 않고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 심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까지 하시며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까? 그리고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다면, 지금의 고통, 지금의 상처 좀 견딜만하지 않습니까?
요즘 코로나 19 여파 때문에 여기저기 우리가 버팀목처럼 여겨졌던 것들이 흔들리며 무너지는 안타까운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가을의 깊은 맛이 단풍인데 그것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여유조차 없이 살아갑니다. 오늘도 자고 일어나면 들리는 소식은 어둡고 우울한 소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십년 동안 일구워 왔던 사업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취업의 문은 꽁꽁 얼어붙고, 어디 나돌아 다니지도 못한 채 우울증 환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른 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다윗이 붙잡았던 그 하나님,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희망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다시 힘을 내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기도할 수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