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 마9:36-10:4. 2020. 11/1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건강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여도 건강을 잃으면 그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행복하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보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 목숨을 바칠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내 생명을 다 바쳐도 좋다 할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고, 상황이 절박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네 번째 요소는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노인학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현대 노인들이 겪는 고통 가운데 하나가 ‘역할 상실’입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노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참 일해야 할 때에 할 일이 없다는 것,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내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여기 모인 여러분 역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감,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사람을 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본문에만 표현되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리들을 보실 때 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마태는, 그 이유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36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여 죽게 되었음이라"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헬,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말씀은, 더 정확한 우리말 어감으로 번역하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는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아시는 대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눅 6,39절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지도자들을 소경,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소경입니까?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경됨은, '잘못된 눈' 곧 '잘못된 시각'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고, 기진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로 그 다음 말씀, 마10:1-4절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10장에 언급된 12제자의 이름은, 그저 단순한 12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주님이 이들을 세우실 때 그냥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이 12 사람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시의 소경 같은 목자들, 소경 같은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던 '새로운 목자'라는 겁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말합니다. 새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할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12명 제자들의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에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를 보세요. 시몬이 이름인데 그를 베드로라고 별명을 붙이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의미인데 이는 고상하게 씌여질 때 그렇습니다. 시장용어로 ‘짱돌’ 또는 ‘돌쇠’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보세요. 그 둘은 형제인데 성격이 불같습니다. 사마리아에 갔다가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들의 말을 안 들으니까 불을 내려서 다 없애버리고자 한 분노 조절 장애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우뢰’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도마를 보세요. 자신이 안 본 것은 안 믿겠다는 자기 고집이 장난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상상이 안갑니다.
도저히 하나 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노래하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여기 제자들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십시오. 12명 가운데 10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정말 이들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 다 순교의 자리에 섭니다. 그들 속에서 거룩한 주의 향기를 온 땅에 펼쳐 보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거꾸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의심쟁이 도마는 인도까지 복음 들고 갔습니다. 거기서 몸이 껍질 채 벗겨지는 고통 속에 순교합니다. 자신이 으뜸이 되고자 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키는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도대체 이들 앞에 선 예수가 누구길래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감당 할 수 있나요? 동시에 이제 임직을 받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남 보다 우월해서 직분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정말 변화되기 힘든 자기만의 고집과 삶의 현장에서 묻어있는 경험들이 포기 되지 않는 모습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전통, 또 생각하는 그 신앙이 기준이고, 바른 신앙이라는 것이 몸에 배여 있습니다. 그것을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깨뜨리는 일이 얼마나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여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보좌에 앉아계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장에서 노래한 것처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6-8)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생전에도 늘 자신을 낮추셨고, 낮고 천한 자들을 꺼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매국노라고 부르는 세리의 집에 들어가 기꺼이 같이 식사를 하셨고, 심지어 세리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부정하다고 가까이 하지도 않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인권도 없고 남자들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며 살던 여인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고 놀림을 받고, 아브라함의 피를 더럽힌 사람들이라고 저주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머물며 주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셨습니다. 선생이요 주님이신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당시의 풍습으로는 결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기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낮은 자들과 어울리시고 낮은 자리에 내려가시는 것 때문에 주님의 권위가 추락했거나 주님의 품위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겉 폼만 잡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런 주님께 손가락질을 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삶과 행동에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고, 낮은 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던 주님의 모습 앞에 그들은 달라져 갑니다. 함량미달인 자신들을 불러 새 시대를 이끌 제자로 심으신 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한때 짱돌이라고 불리운 자신이지만, 이젠 믿음의 반석으로, 분노 조절 장애로 살던 인생이 은혜를 깨달으니까 사랑의 사도로 바뀝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물질의 노예가 되었던 인생이 복음을 토해 놓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의심 많은 인생으로 살던 그는 예루살렘에서 인도까지 복음들고 한 생을 멋지게 살아갑니다. 모두가 삶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들 앞에 시대가 바뀝니다.
보세요. 제자로 부름받은 자녀들은 초심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삽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신앙생활에 고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성도들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 세상이 말합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살려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적으로 보면 자신들에게 유익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미래 보장도 없는 제자의 길을 묵묵히 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부르신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첫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첫사랑 앞에 서야 합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은 그 한량없는 은혜 앞에 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한 이번 임직자들, 그리고 명예 권사로 추대 받는 여러분들은 이 어려운 시대를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첫 사랑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 도자기하면 흔히들 영국 도자기가 최고인지 알지만, 일본 도자기가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도자기계를 이끄는 사람들이 바로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 중에 일본 도자기 계의 대명사인 사쓰마야키의 14대 심수관씨가 있는데 이 분이 한 이야기는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긍지를 그대로 400년이 넘도록 이어왔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수관 소년을 작업실로 부르더니 구슬만한 흙덩어리를 뭉쳐 도자기를 빚는 물레 위에 올려놓고 바늘 하나를 조심스레 그 중심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무엇을 느끼는 지를 물었습니다. 수관 어린이가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자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너의 인생이다" 그때 수관 어린이는 아버지의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은, 타국에 끌려온 조선도공의 피와 얼을 이어 받은 조선인의 후손으로써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패자로 눈물을 흘리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무려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움직이는 물레 속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으라'는, 이 한마디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이란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확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각오와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열정도 이 혼탁한 세상 탁류에 묻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도 달라졌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어내고 있는 지금도 이전과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아 달라졌습니다만, 코로나19 사태가 끝난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계속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변할 수 없는 확실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상황이 변화되고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정말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점점 직분 받기를 힘들어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10사람과 10분의 명예 권사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새 시대를 이끌어 갈 , 미래를 여는 사람들로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정말 어설프게 한발은 세상에 딛고, 또 한발은 교회에 딛는 어정쩡한 모습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일사 각오의 신앙으로 열정을 다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여러분의 처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한 생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