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겠습니까? 염려하겠습니까? 마6:25-34. 2020. 11/8.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삶이 위축되고 불확실성이 강한 시대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 감사대신 염려의 안개가 가득 퍼져있습니다. 여러분, 2020년 올 한 해 너무너무 힘들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힘든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신앙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전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 ‘범사에’ 라는 말은 ‘모든 상황 속에서’라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힘들수록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힘든 시대 먹고 살 것 때문에 걱정하고 한숨이 깊어만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먹을 것을 얻지 못한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기르시지 않는가? 그리고 저 들판의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다 자라게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나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이렇게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그 감사를 갉아먹는 기생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라는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이 뭔지 아십니까? 염려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말세가 되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악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도록 만들어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조차 하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도록 만들 위험이 있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방탕이요, 둘째는 술 취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염려라고 합니다. 우리는 방탕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하고 알코올에 중독 되면 벌써 인간다움을 이미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방탕과 맞먹는 악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만큼 염려는 해로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돈에 마음이 빼앗기면 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영과 육을 망칩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이와 같은 쓸데없는 염려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발목을 잡아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비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오지 아니하는 내일을 놓고 왜 그렇게 염려해야 합니까? 여러분, 염려라는 단어가 영어로 뭐죠? worry입니다. 이 뜻은 ‘물어뜯다’ 라는 단어입니다. 지금도 자주 쓰이지 않지만 영어 사전에 몇 번째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잠17:22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good medicine)이라도 심령의 근심(crushed spirit)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심령의 근심이 바로 염려죠. 영어 성경 보면 crushed spirit이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가요? 마음이 으스러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몸도 망가뜨립 니다. 가장 단단한 뼈가 마를 정도니 몸이 남아나겠느냐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염려를 묶어 놓을 수 있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3가지의 감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감사라고 하는 쇠사슬로 염려를 콱 묶어 놓고 꼼작 못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Ⅰ. 첫째 감사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의 감사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잘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는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염려하는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플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내가 나를 보아도 미덥지 못한 나를 위해 예수님이 나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사랑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십니다. 그 분이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내 인생을 지켜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 앞에 선다면 우리는 다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은혜 앞에서도 때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 실망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날샘에 우리가 보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광야생활하던 중에 그들은 참 많이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생활하는 내내 말입니다.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기만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신1:29-30절에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에게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신31:7-8절에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그렇습니다.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가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저 공중의 날아다는 새들과 들에 핀 이름모를 들풀도 주님이 주관하시는 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여러분 감사해야 합니다.
Ⅱ. '있어야 할 줄을 아느니라.'의 감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필요를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32절에 가서 '이러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을 주님이 책임을 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공급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염려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빌립보서 4:6-7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전히 우리의 삶에 염려와 걱정이 밀려온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밑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염려스러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바꿔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염려스러운 상황을 바꿔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상황은 변함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평안을 얻게 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염려스럽게 만든 상황을 이겨나가는 감사의 힘을 얻게 됩니다.
Ⅲ. 마지막 세 번째 감사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대한 감사입니다. 33절은 다 외우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확신의 감사는 좋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아니해도 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들어갈 내세 천국도 포함하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기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 통치를 잘 알고 따르는 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을 주의하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훈련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을 나갑니다. 똑 같은 생활이 반복 됩니다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의 태도는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아무리 바쁘고 쫓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이 스케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일치시켜 주십시오."
하고 단 5분, 10분이라도 기도하고 일어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 이것이 영적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를 일치 시키고 우리의 삶의 무게를 하나님의 나라에다가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제일 먼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제일 뒤에' 하는 식으로 우선 순위를 바로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보면 그 초대교회 성도들이 별명처럼 자기 이름 앞에 붙이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티테디오스는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을 뜻입니다. 초대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식합니다. 가난합니다. 그들의 삶에 무슨 인간적인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그들이 보고 나서부터는 그들의 가슴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했는지 모릅니다. 한 생을 주님의 복음 위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종사하는 모든 생업을 통해서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로마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세계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삶을 살자 염려가 다 날라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니 이것을 좀 자랑하고 싶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테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도마 하고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염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티테디오스 옥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여러분 한번 해 보십시오. 티테디오스 자기이름 한번 불러 보십시오. 티테디오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제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십시오. 저는 감사는 기적의 씨앗이라는 말씀을 이 강단에서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해도 좋습니다. 저의 경험에 결코 손해가 없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보면 5가지 감사를 쓰라고 했습니다. 한해를 돌아 볼 때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안다면 마땅히 감사가 일어나지 않겠나요? 그리고 지금 좀 힘들다고 지금 좀 어렵다고 그냥 무관심하거나 그 힘듬의 굴레 속에 두려움과 염려가 있어서 주저앉는 다면 이것은 신앙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 우리는 전심을 다해 감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힘들고 염려가 많은 시대에 3부에 33분의 임지하시는 분들, 은퇴자, 그리고 명예 권사를 추대하는 감격의 시간을 갖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는데 우리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섬김으로 정말 올해 가장 큰 감사의 자리에 사람을 세웁니다. 이 티테디오스. - 염려에서 해방되어 시대를 열어가는 이 분들은 바로 기적을 써내려 가는 분들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큰 시련을 겪는다 하더라도 우리 입에서 ‘감사’라는 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감사하면 따뜻해지고, 감사하면 마음에 여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릴 가장 큰 찬양의 제사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