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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2 신앙의 결산 - ①. 회개, 구원에 이르는 관문 (고후 7:1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11-23 | 조회: 451
신앙의 결산 - ①. 회개, 구원에 이르는 관문 고후 7:10. 2020. 11/22
 
여러분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바둑 한판을 두는 데는 보통 400여 수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프로 기사들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복기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두뇌가 뛰어난데다가 강훈련을 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프로가 아니더래도 이것은 가능합니다. 저도 바둑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바둑을 잘 두시는 분에게 어떻게 복기가 가능한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담을 했습니다. “프로 기사들은 의미 없는 돌을 놓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돌만을 놓기 때문에 그 의미를 따라가면 복기가 가능하지요”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30년을 살았습니까?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살아 오셨습니까? 가운데 몇 수까지를 복기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복기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살았다면 내 인생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돌을 놓아야 합니다. 2020년도는 유난히 힘든 한해였습니다. 아직도 코로나 19의 여파로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제 한 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끝 지점에 오면, 우리가 점검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시간을 가지고 주님과의 결산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두 차례에 걸쳐 편지를 썼습니다.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8절에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편지가 바로 그 '눈물의 편지'인 고후서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바르지 못한 신앙을 아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꾸짖긴 했지만, 그들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썼는데, 그 어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적지 않게 마음에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자신의 편지 때문에 사랑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근심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잠시 '내가 왜 그런 편지를 썼을까? 혹 이 편지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믿음에서 떨어져나가는 사람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는 바울의 마음이 놓였습니다. 바울의 그 편지로 인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근심하였는데, 그게 오히려 교인들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여기서 회개를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가 구원의 관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이고, 천국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한 나라나 한 도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관문’(關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관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옛 관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오늘도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외국을 가려면 반드시 공항에 내리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에서는 우선 사람을 조사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들어올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짐을 조사합니다. 짐 안에 마약류나 나라가 금하는 물품이 있지는 않는지, 무기가 있지는 않는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어쨌든 누구든지 어느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관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 4: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고 약해서도 짓고 고의적으로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짓고 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인생을 보고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가 짓는 죄가 우리에게 멸망과 심판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또 어떤 때는 그 죄가 오히려 은혜와 축복의 길을 우리들에게 열어 주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죄짓고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또 죄짓고 복 받은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죄짓고도 하나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의를 행하고도 하나님께 싫어 버림받은 사람도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 원어로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변화’를 뜻하는 ‘메타’(meta)라는 말과 마음의 생각을 뜻하는 ‘노이아’(noia)가 합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마음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짓누르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앞에 닥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속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하고, 내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회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칭의를 위한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여기서 칭의는 처음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성화는 칭의 과정을 거친 뒤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를 닮아가며 성숙해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과정 모두에서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Ⅱ-1. 우선 칭의를 위한 회개를 살펴보겠습니다. 행 2:38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은 뒤에 아직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리고 행 3:19절을 보면 베드로가 또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믿지 않고 살았던 죄,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살았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를 위한 회개는 원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칭의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만 마물지 않습니다. 이 칭의의 구원을 받고도 우리는 여전히 죄 문제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나는 구원을 못받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 칭의의 문제를 해결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 문제 앞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Ⅱ-2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일단 회개하고 구원의 관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롬 7:19-20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면서도 예수 믿으며 겪어 온 연약한 삶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사도 바울도 그런 고민 때문에 절규하지 않았습니까? 롬 7:21-24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신에게 죄가 역사해서 자꾸만 자신을 죄 아래로 끌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이후에도 이 고통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의 관문에 들어서긴 했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죄를 저지르며 삽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자범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화를 위한 회개는 이 자범죄를 회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 지며 마지막까지 구원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을 아시지요? 다윗의 일생을 연구해보면 정말 다윗은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왜요? 다윗은 실수가 너무 많아요. 허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몇 곳 보았는데, 전문가가 연구를 하고 책에 써놓기를 성경에만도 스무 곳 이상의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상이 기록도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 문제를 감추거나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돌아보며 즉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의 회개에 중요한 점은 절대로 변명이 없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를 않습니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도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밧세바와의 관계를 보세요. 이 간음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죄를 회개할 때에 그는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의 실수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건 내 잘못입니다. 아무 변명도 없고, 책임전가 의식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입니다. 시 6편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6-7을 보면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를 낱낱이 깨닫고 난 뒤에 눈물로 통회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한 근심 때문에 눈이 다 쇠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깊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저지른 구체적인 죄가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근심하며 눈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빌2:12절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은 노력해서 구원을 완성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도 늘 조심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싸워야 하는 신앙인의 영적인 투쟁은 한두번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하는 길고 긴 영적인 전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갔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언제나 자신의 처절한 죄를 깨달았고, 자신 안에 있는 죄로 인하여 영적인 고민, 거룩한 고민을 멈추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거룩한 고민은 결국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를 회개함으로 우리를 더욱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가는 계기가 됩니다. 죄악 중에 살아가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죄에 대해서 거룩한 근심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죄를 바라보는 눈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며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은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통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기준에 통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것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합니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자백한 죄에 대해서 용서를 선언받는 사람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 거룩한 근심을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된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개봉된 영화 ‘밀양’은 여러 가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회개를 꼬집고 있습니다. 아이를 유괴해서 살해한 범인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범인을 찾아 면회를 왔습니다. 범인과 대화하면서 범인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내심 용서해 줄 생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범인의 모습이 너무 당당합니다.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없는 모습을 보고 아이 엄마가 왜 내 아이를 죽였느냐고 울부짖으며 따졌습니다. 이 때 범인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 받았다. 나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엄마는 더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내가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며 회개 기도를 드렸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일단락이 져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 해결할 문제가 남았습니다. 내가 죄를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들에게 배상하고 그들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 법을 어겼다면 세상 법에 따라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오며 저질러 온 그 모든 죄들에 대해 회개해야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서 연약하여 때로는 알고 또 때로는 모르고 저질러 온 죄들을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해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통회하는 마음을 주실 때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눈물로 참회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용기를 주실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한해를 마무리 할 때, 하나님 앞에 내 삶을 겸손하게 내려놓고 회개의 기회를 삼는 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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