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 구원의 여정 그 두 번 째 약1:19-27. 2020. 12/6.
우리는 지난주에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서 칭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 신분의 변화, 이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과 나아가서는 영화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비행기 여행에 비유해보았습니다. 칭의는 비행기가 막 활주로를 이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화는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나아가 영화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무사히 착륙한 이후의 과정을 말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여정인 성화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화란 글자 그대로 ‘거룩할 성’(聖)과 ‘될 화’(化) 즉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sanctifica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성화 즉 거룩하게 되어간다는 것은 구별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점점 세상과 구별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가평에 있는 ‘필그림하우스’라는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처럼 거의 침묵을 요구하는 수도원 분위기의 기도원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로비에 책들이 있었는데 이동원 목사님이 쓴 야고보의 강해설교인데 ‘너희는 성숙을 점검하라’는 제목이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우리나라도 근 한 달 동안 확진 자 수가 500명대가 넘나드는 위기 상황이고 백신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 혜택이 올지 모르는 이 과정 속에 누구나 죽음이라는 그림자의 그늘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엊그제 코로나가 발생했는데 벌써 전 세계인 가운데 65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양성 확진자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사망자도 150만이 넘어서고 있습니다.
과연 이 상황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마냥 두려움의 그늘에 있을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에베소서를 살피다가 본문을 바꾸었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한마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한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 합니다. 그것은 ‘성숙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 이후의 너는 정말 예수를 닮아가고 예수님의 그 향기를 발하고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성화의 구원을 잘 설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3가지 모습을 보여 줍니다.
Ⅰ. 분노를 잘 다스립니다.
성화의 삶을 말하면서 야고보는 분노의 문제를 먼저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쉽게 대답을 드리면 분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가 어렵게 때문입니다. 요즘 분노조절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분노가 장애라는 말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9-2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인류가 타락한 후 최초의 범죄가 바로 가인의 분노였습니다. 이 분노로 그는 형제 아벨을 살인했습니다. 분노라는 단어는 성경에 무려 450회나 등장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플라벨은 세 종류의 분노가 있다고 했습니다. ①. 자연스러운 분노, ②. 거룩한 분노, ③. 악한 분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분노로서 죄라기보다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잘 조절하여 분을 내면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 촉발된 의분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몇 번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크게 화를 내셨고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도 엄중하게 책망하며 저주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길을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선 베드로에게 정신이 버쩍 들도록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마 16:23). 이처럼 불의에 대한 분노,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노입니다. 즉 거룩한 의분입니다.
분노의 종류 가운데 또 한 가지, 악한 분노가 있습니다. ‘악한 분노’는 도에 지나친 분노로서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과격한 분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가 악으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야고보는 20절에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성냄-분노가 바로 악한 분노입니다. “사탄은 불만이 가득하고 분노하는 영이기 때문에 화를 품고 있는 마음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환경 가운데 하나는 악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마음입니다. 숯불이 화로 안에 있을 때에는 안전하고 유익하지만, 화로가 넘어져 숯불이 방안에 쏟아지는 순간, 불길이 방바닥을 태우고 금방 집 전체로 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화로를 쓰러뜨리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숯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서 “악한 분노”가 터져 나오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휘저어 분노의 불길을 거세게 지피고 있습니다. 분노는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박힙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몸도 상하고 마음의 병이 들 가능성이 큽니다.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살았다 하나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이 분노가 조절 되지 못하면 삽시간에 주변이 분노의 불바다가 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큰 해를 입힙니다. 성경은 분노가 폭발하려고 할 때 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라고 권합니다. 시 37:7-8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오죽하면 잠16:1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했겠습니까? 분노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분노에 서로 잡혀 있으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분노하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4: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궁극적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유일한 처방으로 성령 충만을 권합니다. 엡5:18절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내 마음의 분노가 솟아 날 때마다 본문 20절을 기억하십시오.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성령으로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있는 성화되어가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Ⅱ. 성화에로의 삶은 말씀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2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성화에로의 삶의 첫째 증거는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통제되지 못한 분노는 악입니다. 이런 악을 버리고 야고보는 다음으로 성화에로의 삶으로 나아가길 사모한다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온유는 잘 다스려진 마음입니다. 그 다스려진 마음으로 이제 말씀을 마음에 받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인간의 거듭남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그 말씀으로 자라나기를 사모하십시오. 정상적인 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사모합니다. 벧전2:2절에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 안에 믿음이 시작 된후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에 더욱 가까워 지셨나요? 한 신학자는 “말씀과 나와의 거리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기적으로 말씀을 읽고 듣고 있나요? 말씀을 잘 수용한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에서 시작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여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 인격으로 반응하여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보호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갈 6:6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함께 하라”는 말씀은 성경언어로 말하면 ‘코이노니아’라는 말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 ‘교제, 사귐, 나눔’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 - 생명까지도 -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르침 받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목사와 좋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는 다니고 있을지라도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라지도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방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의 전술에 빠져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Ⅲ. 성화에로의 삶은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위대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문 22절은 행함의 의도가 없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3-24절은 그것은 마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행위와 같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축복이 되려면 말씀을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27절을 보세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기 ‘경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바르게 사는 삶, 우리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끌려 사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그 삶의 방향성이 변화되어 사는 삶’ 입니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한다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성화에로의 삶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삶에 대한 구체적 지침이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 것이니라’ 이 말은 내 안에 흐르는 생명의 생수를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죽은 이론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생수가 흐르는데 이 생수를 마신자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갈증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생수라고 여겨지는 것을 들이마셔도 갈증해소는 그때뿐이지 진정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보세요. 홍수가 나면 사방이 물로 가득찹니다. 하지만 정작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고 여전히 갈증만 더 심해집니다. 우리 인생의 갈증을 해결 할 수 있는 생수는 이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생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생수를 마신 자는 더 이상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나눕니다. 왜 야고보기자는 성숙을 점검하라고 이야기 하면서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닮아 가는 이 땅에 순례자들입니다. 우리, 성탄의 계절에 절망과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릅시다. 희망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모두 덮어두고 하나님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이제 말씀처럼 분노의 늪에서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고 구원받은 값없는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이 힘든 현실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성화에로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