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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3 영화, - 구원의 여정 그 마지막. (딤후 4:6-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12-13 | 조회: 438

영화, - 구원의 여정 그 마지막. 딤후 4:6-8. 2020. 12/13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백신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하여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졌다 하더라도, 일상의 삶에 수없이 많은 제약을 받아야 할지라도, 경제가 어려워져 우리의 삶이 힘들어졌어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리운 사람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신앙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서 믿음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일에 여러분에게 다시 영상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운명을 하게 된 교회 어느 여성도가 저에게 메일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곁을 떠난 것도 가슴 아픈데 과연 아버지가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셨는가 하는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매의 편지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혹시 천국가시라고 기도하는 건 가능한지요? 그냥 가셔서... 저흰 불교는 아니라...” 참 안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분주하게 사람들이 어느 날 가족 중에 죽음을 당하면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하면서도 가장 그 답을 찾기 힘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람은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5분의 동역자들을 천국에 보내 드렸습니다. 제가 담임으로 사역하면서 100여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겼습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와 영혼이 분리가 됩니다. 19:30을 보면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주님의 육체는 남아있고, 그 영혼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죽을 때 육체는 이 땅에 남고 영혼은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다릅니다. 우선 믿는 사람들은 낙원이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23:43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 중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그러니까 육체에서 분리된 믿는 사람의 영혼은 낙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영혼이 낙원으로 가게 되면 그곳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머물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잠정적인 낙원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죽을 때 육체를 떠난 영혼은 어둠의 곳 음부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역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까 잠정적인 음부의 저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상황은 또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살전 4:16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그 육체는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혼과 연합하게 됩니다.

 

요일 3: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이 말씀대로 부활한 육체와 낙원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던 그 영혼이 다시 연합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변화된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펼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서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 육체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음부에서 두려움과 고통가운데 기다리고 있던 영혼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져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장차 구원이 완성되는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그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인격 전체가 영광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롭게 변화될 때 그동안 죄로 인해 변질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야 말로 구원의 종착점이자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죄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알고 짓고 모르고 지으면서 죄로 얼룩졌던 그 영혼이 그 모든 죄악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그 성향마저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가 부활합니다. 이 때 우리의 육체가 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와 다른 신령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는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변화된 그 육체는 낙원에서 이미 영화의 과정을 거치고 기다리고 있는 영혼과 다시 연합하여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은 우선 온전한 거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도 없고 그래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은 비로소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3:12절에서 꿈꾸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말씀 그대로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드디어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 가운데 영원토록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 영화 구원을 향한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6절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여기 전제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제는 구약의 제사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마지막 의식으로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습니다. 제물의 마지막까지 다 불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예견한 것입니다. ((포도주 붓는 제사 그림))

 

 

또한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이제 주어진 시간이 끝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선착장에서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정박을 위해 매어놓은 로프를 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기기 위하여 장막을 거둔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정박해놓았던 닻을 걷어 올리고, 로프를 풀어야 합니다. 그동안 살았던 장막을 걷어 올려야 합니다. 이런 말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님께 쏟아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알고 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때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죽어 마땅한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자기가 살아가야 할 시간들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주신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 영화의 그날까지

 

7절의 말씀이야말로 바울의 생애를 가장 극명하게 요약해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의 일생을 요약하는 세 마디는 '싸웠고, 마쳤고, 지켰노라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어두운 사탄의 세력에게 결코 굽히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주하기 그 먼 거리를 다 달린다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표현합니다.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교회를 옮겨다니고 적은 봉사 자리에서 사표를 쓰고, 고함치고 시끄러운 교회로 만드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디 예수 믿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자존심을 살리셨나요? 그 죽음이 두려워서 십자가를 포기하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 바울도 약한 사람입니다. 지금 이 본문은 영웅의 자서전이 아닙니다. ! 16-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여기 보시면 그의 삶이 얼마나 고독했던가를 보여 줍니다. 그를 따르던 자가 더 이상 고난과 핍박의 길을 같이 하지 못하고 다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한 복판에서도, 자기를 따르던 자가 다 떠나도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는 은혜 앞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딤전 1:13절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으나디모데서는 바울이 교회에게 쓴 것이 아니라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입니다. 자기 제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기가 과거에 행했던 부끄러운 일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난 날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드러내며 자기 제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믿어 주셨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서라도 그 믿어주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 영화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여기서 면류관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월계관 그림 )) 이 말은 원어로 스테파노스라는 말입니다. 스테파노스라는 말은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자에게 주어지던 올리브 나무 가지로 만든 관을 말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우승자 한 사람에게 올리브 나무 가지를 꺾어서 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그는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됩니다. 자기 나라에서 영웅일 뿐 아니라 온 그리스 세계에서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돈을 받거나 토지를 받는 등 물질적 보상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영예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모든 사역을 마치고 최선의 경주를 끝내고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이 점점 다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 광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환자들을 수용할 병상이 태부족입니다. 그냥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자신이 이런 죽음을 맞게 되리라고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게 인생입니다.((병상 그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마3: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는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타작마당에서 손에 키를 들고 키질을 하는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우리의 삶 가운데 쭉정이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키질을 하신다면 우리의 모습들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바람에 날아가버릴 쭉정이가 분명 있습니다. 겉은 그럴 듯합니다. 어쩌면 알곡보다 더 화려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키질을 할 그 때에는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쭉정이인지 분명하게 가려질 것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쌓이게 될 것이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고 맙니다.

이미 천국에 가 계시지만, 저희 장모님은 목사 사모로서 한생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던 분입니다. 자녀들 공부시키기 위해 삯바느질서부터 안해 본게 없는 지독히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 분입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놓치지 않으셨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무릎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어르신은 저에게 안목사 알곡 목회를 해야 된다.’ 참 뼈있는 당부입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이 맘 때가 되면 기업들은 저마다 결산하느라 분주합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 우리에게도 결산이 필요합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또 마무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결산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결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지금 성화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을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장차 우리가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온전히 영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결국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영화를 누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믿음 잘 지키고 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한 해의 끝자락에서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신 그 주님의 은혜의 품에 내 삶을 맡기십시오. 우리 모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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