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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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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0 (성탄 주일 설교) 이 시대의 소망 - 예수 (사 61:1-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12-20 | 조회: 450

이 시대의 소망 - 예수 사 61:1-3. 2020. 12/20. 성탄 주일 설교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즐거워하는 성탄절입니다. 올해 2020년도는 전 세계인들이 코로나19로 참 어려운 한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힘든 시절 성탄을 맞는 여러분의 삶에 주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앞으로 메시야가 오신 뒤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돼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습니다. 전례에 따라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4:18-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그리고 내려가서 21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새로운 시대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탄생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변화는 무엇입니까?

 

 

. 회복입니다.

 

1절에 보면,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 나를 보내사란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말씀을 합니다. 여기 보면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가 가난한 사람, 둘째가 마음이 상한 사람, 셋째가 포로 된 사람, 그리고 넷째가 갇힌 사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모두 실패자들이라는 뜻의 루저’(loser)들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루저’(loser)라고 낙인 아닌 낙인이 찍힌 수많은 인생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과 상처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에 갇혀 살아갑니다. 과거를 떠나보내야 하는데, 떠나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합니다. 상처는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넘어집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찮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어느 누구 예외없이 다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에서 고름이 나옵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몸을 썩게 만듭니다. 육체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치유하지 않으면 심한 고통을 동반하기에 즉각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와 달리, 바로 조치를 취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미루다가 더 큰 고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어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두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잘못하면 절제력을 상실한 채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이사야는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로 이야기를 합니다. 한 마디로 희망이 없는 실패자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 서 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저들을 실패자라고 부르신 일이 없습니다. 저들을 실패자라고 조롱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따뜻하게 위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유명한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정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 영적으로든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 어떻게 내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더 이상 아픔이나 부끄러움으로만 남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한 치유의 원천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상처입고 아픔 많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헨리나우웬)) - “상처 입은 치유자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자로 표현합니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추종하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자 가족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면 슬퍼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우리 마음에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잘못했을 때 슬퍼하십니다. 내가 고통에 빠져 통곡하고 있을 때 슬퍼하십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마을로 달려 갈 때, 그를 지켜보던 예수님의 가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를 보시고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두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양심이 마비되어 숱한 죄를 범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괴변을 늘어놓는 바리새인들을 보실 때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나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뭇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상처를 받고 그는 거기에서 살이 찢겨지고 피 흘리면서 죽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처받는 생애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상처받고, 제자들로부터 상처받고, 마지막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처를 온 몸에 지니고 죽는 상처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처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예수님은 결국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면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복음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칩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줍니다.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아픔을 하나님 앞에 꺼내놓으세요. 하나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만져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 회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고,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게 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실패자들에게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다고 다시 일어서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가치의 회복입니다. 여기 가난한 자나 마음이 상한 자나 포로된 자는 단순히 세상 앞에 억압을 당한 자란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에게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복은 단순히 육신의 회복만이 아닙니다. 6:3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생명의 떡이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이 되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나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더 나아가 포로된 자들까지도 하늘의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하십니다. 전쟁과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온다 하더라고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하늘의 평강을 공급해 주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모든 것을 소유한 자처럼 하늘의 풍요를 누리며 살게 하는 힘을 덧입혀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하는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한번 해결된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도 2020년 한번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021년은 어쩌면 더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만 퇴치된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다고 우리의 삶에 염려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2002년 사스를 이겨내자 2009년 신종플루라는 독감 바이러스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었고, 이어서 메르스, 에볼라, 지카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올해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팬데믹에 빠뜨렸습니다. 이것도 곧 지나갈 것입니다. 2021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결코 끝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를 겪어야 했던 것처럼 언제 또 다시 새로운 바이러스가 우리 인류를 위기에 빠뜨릴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위기를 극복해냈다고 좋아하는 순간 또 다른 위기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건강을 회복했다고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또 다시 우리는 건강의 염려에 빠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삶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시지만 우리가 주님을 나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심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으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에 연연하면 우리의 걱정거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주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면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성탄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 변화의 자리에 섭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의 기쁨을, 근심대신 찬송의 옷을 입는 그야말로 메시야를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포자기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의의 나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루저라는 실패의 굴레에 갇혀 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을 왜 기뻐해야 합니까? 연약한 나의 죄를 당신의 보혈로 덮어 주시고 내 영혼 깊은 곳에 생명의 떡을 주셔서 하늘의 소망을 끌어안고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치유와 회복, 그리고 분명히 예수를 만난 인생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공회 대성당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영국의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원 안에 영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있는데 여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에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세 마디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이고, 둘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이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분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위대한 부흥도 체험했습니다. 이분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영향력도 끼쳤습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두고 한 평생을 돌아보며 가장 좋았던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주십니다. 넘어졌을지라도 엎드러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도 넘어집니다. 때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계획하고 추진해 오던 일들이 무산되고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성탄의 주님은 다가오셔서 나를 일으겨 주시고 사명자로 세워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에 이 기쁨을 우리 가정에 가족과 함께 나누십시요, 그리고 해마다 섬기는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손길의 향기가 아름답게 퍼지기를 바라고, 우리 주변에 소외된 분들에게 이 기쁨을 함께 나누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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