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고후2:15-16. 2021. 1/3. 신년 주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새해 첫 주일을 이젠 점점 익숙해지는 영상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대면 예배를 통해 혹여나 나의 신앙생활이 점점 무뎌지지 않도록 더욱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오늘 함께한 본문에 보면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다 나름대로의 냄새가 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내게서 풍겨지는 그 냄새에 따라서 우리 주변에 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술친구들이 몰려듭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학생들도 놀기 좋아하는 학생의 주변에는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고,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성품과 삶에서 풍겨지는 인격과 삶의 냄새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향수를 뿌리고 좋은 냄새가 나게 하려 해도, 인격과 삶에서 드러나는 냄새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슨 냄새에 취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지금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고 있습니까?
지금 코로나 19는 언제 멈출지 모를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 19는 분명 사망의 향기입니다. 죽음의 향기입니다.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습니다. 이 사망의 향기인 코로나는 온 땅에 사람들에게 무서운 두려움과 공포를 주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이 죽음의 향기가 인류를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향기인 코로나19로부터 우리 인생을 살리려고 세계는 백신을 개할 하거나 또 그것을 구입하려고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이 백신이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나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인류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의 냄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 먼저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는 곧 생명을 주는 냄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냄새인 것이지요. 이 말씀에 비추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시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설 때이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예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는 자는 모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영생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향기를 풍성하게 풍기며 다니셨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암담한 시대에 오직 생명의 향기인 예수를 온 땅에 드러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2021년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이란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생명을 잃은 썩은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특히 우리 소중한 인생을 죽음의 향기인 코비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마냥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신 이유는
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 15절로 16절 말씀입니다. 다시 봅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많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까? 몇 달 혹은 몇 년씩 멀리 원정을 나가 전쟁을 하고는, 이제 이겨서 개선을 할 때는 승전고를 울리며 전리품과 포로들을 끌고 돌아오는데, 꼭 큰 향로에 향을 피우면서 입성을 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영화의 장면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향을 피우며 입성을 하였겠습니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개선하는 군사들은 이겼다는 마음에서 시끄럽게 승전가를 부르며 의기양양해 하지만, 실제에 있어선 피와 땀과 때로 절은 그들의 옷과 몸으로 인해서,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악취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냄새를 제거하기 위하여 향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향기란 승리의 상징이요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향은 기뻐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승리한 군인들은 기뻐하는 향을 풍기고 이들을 맞이하는 백성들에게는 환영하는 향기입니다. 그래서 이 향내를 맡으면서 생기가 솟아오릅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생명에 이릅니다. 기운이 없던 사람도 기운을 내고, 정말 앓아누웠던 사람도 이 향기를 맡으면서 병이 낫는 겁니다. 그런 생명적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반면에 전쟁에 패배하고 끌려오는 그 포로들에게는 그 향내가 곧 죽음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이 냄새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맡기 싫고 맡기가 두려운 그런 냄새입니다. 전쟁에 패한 굴욕감뿐만 아니라 냄새가 짙어오면 올수록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세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여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무슨 말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과 달리 저 만큼 뒤에서 끌려오고 있는 포로들의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그들 중 상당수는 이제 몇 시간 후면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고, 개중에 얼마는 노예로 팔려가 평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냄새는 바로 사망의 냄새인 것입니다. 분명 똑 같은 냄새임에도, 승리자의 편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요,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복음전도에 대한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그 자체는 놀라운 은혜요, 구원이요, 복이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냄새가 되어 심판의 근거가 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향기란 곧 말씀의 향기요, 말씀의 권세이며 영적인 힘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요, 승리의 향기이며, 빛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를 통하여 병자가 낫고, 굶주린 자의 배가 부르며, 눌린 자가 풀려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향기를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서 썩어가던 나사로가, 생명 되신 예수의 향기가 무덤에 이르게 될 때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향기가 되어 그들이 구원을 얻게 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주는 독약이 되어 그들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Ⅱ.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냄새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아는 냄새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about) 아는 것과 그리스도 그분 자신(He Himself)을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적 신앙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갖는 자체 내의 향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이를 두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고 말합니다. 이 냄새는 그리스도로부터 전달받은 냄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그리스도의 냄새가 알게 모르게, 내게 묻고 베이게 되어 내 인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냄새가 조금씩 조금씩 풍기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사귀면 명예를 얻게 되고, 악한 자와 사귀면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를 쓰다보면 어느 사이에 내게서도 이미 예수의 냄새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예수님의 동생이라는 별명을 가지신 분이 있습니다. 사실 믿는 사람으로서 이 얼마나 좋은 별명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예수의 냄새가 짙게 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시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보면, 애써 억지로 꾸미지 않더라도 벌써 예수의 향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랑하고 즐기며 거기에 심취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냄새를 내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장소에 있다가 나오게 되면, 마치 내가 담배를 피우기라도 한 듯이 냄새가 짙게 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내가 ‘지금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접근하고 있느냐, 그와 가까이 함께 있느냐? 또는 그렇지 못하냐,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이든 그리스도의 향기와 접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냄새는 어떤 냄새인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만날 때에 맡는 냄새는 어떤 냄새인가?’, 그리고 ‘나를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있어서 그 생명이 살아나게 되는가? 아니면 나와 만나는 동안에 가졌던 믿음마저 잃게 되어, 어두워진 마음으로 죽음에 이르고 있지나 않는가?’ ―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제는, 교회를 다니며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내 자신의 냄새는 모두 사라졌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만이 풍길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Ⅲ. 향기는 작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15-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가 풍겨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의 향기가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아무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인격에서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비록 작다 하더라도 큰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아름다운 향기는 온갖 시련과 박해 속에서 더욱 고귀하게 풍겨납니다. 구약성경 아가서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아가서의 저자 솔로몬은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부릅니다. 드넓은 평원에 백합화들이 만발합니다. 그런데 그 백합화 사이사이에는 가시나무들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연약한 줄기의 백합화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곁에 있는 가시나무의 가시에 연약한 백합화의 줄기가 찔리고, 꽃잎이 찢어집니다. 백합화는 가시에 찢기면서 그 안에 감추고 있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냅니다.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백합화는 더욱 진한 향기를 풍겨냅니다. 이어 아가서 4: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북풍과 남풍이 불면 골짜기의 백합화는 더욱 심하게 가시나무에 찔립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향기를 풍겨내게 되고, 그 향기는 북풍과 남풍에 실려서 온 세상에 전달됩니다. 그러면 온 산마루에 백합화 향기가 진하게 퍼져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백합화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 모양보다는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는 가시에 찔리는 고난을 통해서 아름답게 풍겨납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북풍과 남풍이라는 더욱 큰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에 더욱 진한 향기로 세상을 향기롭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의 냄새를 풍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세상이라는 가시에 찔릴 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향기처럼 드러내라는 것 때문입니다.
옷 가게를 하는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상대하셨습니다. 이 옷 저 옷 마구 만지다가 '살 것 없다'며 그냥 가는 사람을 향해서도 웃으면서 인사하시고, 어떤 할머니가 '비싸다'며 툴툴거려도 웃음으로 화답하셨고, '돈이 없다'며 고민하는 가난한 아기 엄마에게는 그냥 주기도 하셨습니다. 한번도 한 순간도 그 분이 안 웃는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 집사님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말입니다. 그 분은 교회 나가자고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을 전도하셨습니다. 어려운 형편을 쪼개면서 여러 복지시설들도 많이 방문하셨습니다.
오늘 문득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거창한 것만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구나. 너무 대단한 것만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구나. 그런 대답을 그 분을 통해 얻었습니다.여러분, 향기는 결코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기 위해서 바울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만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누구 나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향기들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옷에서는 어떤 냄새가 납니까? 쓰레기 치우다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오셨다면 쓰레기 냄새가 날 것입니다. 생선을 만지다 시간이 없어 바삐 오셨다면 생선 비린내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들의 겉모습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인격을 통해서 에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를 풍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들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는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들일 것입니다. 작지만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힘든 시절에 ‘온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동성의 모든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