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② 고후2:15-17. 2021. 1/ 10
자!! 새해 인사를 나누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향기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향기에 대해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보내시나요? 저도 가끔 우리 집에 오는 외손녀의 재롱 때문에 제 아내와 웃을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19개월인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여자 아이인데도 얼마나 자기주장이 강한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실감이 납니다. ‘안 볼 때는 보고 싶고 또 보면 빨리 갔으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정말 이쁘지 않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이이가 아닙니까?
요즘 온 사회가 코로나 19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데 입양아인 정인이를 아동학대해서 숨지게 한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그것도 이제 16개월 된 아이를 저렇게 학대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에 모든 국민이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입양아입니다. 16개월 동안 아픔을 겪고 짧게 머무르고 가서 더욱 가엽고 안타까움이 밀려옵니다. 이 부부가 처음 입양할 때만해도 겉으로는 천사인양 방송출연까지 하면서 자신들을 홍보했습니다. 남들 보기엔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정인이를 수십차레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상습 폭행으로 싸늘한 주검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신앙의 가정이고 남편은 기독교 방송의 직원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누가 봐도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정말 당황스러우면서도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민낯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부패된 인간이 성숙을 멈추려 할 때 이런 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마다 우리가 분노하지만,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환경은 다르지만, 부패한 우리 인간은 내면은 거짓과 탐욕으로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겉에다가 온갖 위장의 향수를 뿌리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람됨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가꾸기보다는 세상의 향수를 뿌려 겉만 번지르르 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합니다. 그 주님은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을 향하여 너는 그리스도의 냄새야,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 가지 비유할 것들이 많은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까?
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14절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씀 가운데 ‘안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에서 수많은 정보를 알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정보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만으로는 ‘그 사람을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지식과 해박한 신학 이론을 갖추었다고 해서 또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안다’는 진정한 의미는 인격적인 앎, 즉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을 ‘안다’라고 말할 때는 그 사람의 외적 조건에 대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그러면서 그를 진정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엄청난 핍박과 고난 속에 있게 됩니다. 이 핍박은 상상을 초월한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 믿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바울의 삶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주의자들과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복음전도자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를 스스로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11:23-27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견딜 수 있겠습니까? 요즘 코로나라는 사망의 향기가 사방을 우겨싸듯 우리의 일상을 불안하게 만드는데 당당하게 믿음 지키고 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고생스런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그와 같은 삶을 그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항상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그 주님께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어도 자신을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더 나아가 이기게 하셨다는 이 체험적 신앙이 그를 어떤 문제 앞에서도 비굴하게 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믿음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과 우리의 사명이 다르고, 사도 바울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 하더라도 믿음의 방법과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결코 복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당히 자신을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에 붙잡혀 나아갑니다. 이것을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영끌해서도 집을 장만 할 만한 돈이 없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이런 삶에 그리스도의 냄새가 가는 곳마다 진동을 하는 것입니다.
Ⅱ.그리고 이 향기는 양면성을 보여 줍니다. 14절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것은 복음의 양면성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복음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향기이지만, 멸망하는 자에게는 사망의 향기가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했지만, 당시 전쟁에서 승리로 돌아온 로마의 장군들은 군대를 이끌고 카피톨리누스 산에 있는 쥬피터의 신전까지 행진합니다. 이 대대적인 환영 퍼레이드에서 선두에는 정부요인과 원로원이 행진하고, 그 뒤에는 나팔수가 행진합니다. 그 뒤에 포로들과 쇠사슬에 묶인 적군의 왕들과 장군들이 뒤따릅니다. 그 뒤에 악사들과 향불이 타는 향로를 흔드는 사제들이 뒤 따릅니다. 이 향기는 온 거리를 진동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비록 거리에 나오지 않아도 멀리서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향기는 로마시민들에게는 그 향기는 승리와 환희의 향기였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향기가 적군들과 포로들에게는 마치 사약과 같이 패배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바로 이것에 비유하여 심판과 구원을 전하는 향기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구원얻는 자에게는 정말 그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멸망할 자에게는 오직 그들에게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분명히 알리는 심판과 사망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 3:16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의 향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이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지만, 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사망의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요3:16절의 복음의 선언에 바로 이어서 요3:18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고 준엄한 심판의 선언을 내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자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기쁨이요 소망이요 사랑과 생명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왕은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아기들을 죽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영광을 지키려다보니,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렇게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향기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진절머리 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거절하는 자는 저주와 심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Ⅲ.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 질문 앞에 서야합니다.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여기 ‘혼잡하게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의 것을 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풍조나 가치관이나 무슨 이해타산이나 그 어떤 것도 희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갓난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50년 동안 그 믿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럴 때 진실로 ‘예수님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몰라요!! 다 각오도 다짐도 하지만,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코로나 19의 두려움의 향기, 사망의 향기에 매몰되어 믿음을 잃어버 리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늘에 있는 존재나 땅에 있는 존재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존재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서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요. 하며 경배 드려야 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분이 우리를 불러서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도망칠 일입니까? 흥분하고 너무 감사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될 일입니까? 이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 최고의 권위, 최고의 능력, 최고의 거룩, 최고의 비전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는 자기 무릎 앞에 우리를 앉혀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지 않니. 너무나 거짓되고 음란하고 더러운 이 세상, 내가 이대로 방치할 수가 없어서 이 세상 사람 가운데 할 수 있는 대로 얼마를 구원하려고 한다. 네가 그 일을 도와줘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너를 먼저 구원한 거야. 내 일 좀 해줘. 나를 위해 뛰어 줘야 되겠어. 그래서 내 생명의 피를, 그 생명의 향기를 너의 삶에 부어 준 거야” 이렇게 말씀하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제 귀에는 들리는데 여러분 안 들리십니까? 들릴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 평생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들립니다. 안 들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비전을 우리와 나누시고 자기 일 좀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먼저 불렀다고 하십니다. 앞으로 우리가 3,40년 세상을 더 산다고 합시다. 그 동안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 뻔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고, 사회적인 명성을 주셨고, 좋은 재능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건강한 몸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황송하면서도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이렇게 대단하게 보시고 자기 일을 맡기시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일을 동성교회에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당당합시다. 우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악취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향기나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제시절 어느 장로님은 신사참배를 주위에서 자꾸 권하자, ‘아, 내게서 향기 대신에 얼마나 더러운 악취가 풍기기에 이처럼 내게 파리 떼가 끓는가?’ 하며, 그래서 더욱 자신의 믿음의 생활을 가다듬고 그 고비를 이겨내었다고 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늘 점검하며 승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 행위 하나 하나가 과연 어떤 향기로서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재확인 하십시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동성의 식구들 안에 가득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