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학고레의 샘 삿 15:14-20. 2021. 1/17
코로나19 사태가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코로나 블루’(코로나19로 인해 느껴지는 우울감)를 겪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어는 기관에서 코로나 불루라고 하는 이 코로나 19에 관련된 우울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 가슴 아프게도 무려 71.6%가 ‘지금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국민 3명 중에 2명이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장기화가 될수록 여러 가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가슴 아픈 통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는 사람들이 전에 보다 짜증이 많아지고 강한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사실은 목회자로서 작년 연말과 올해 새해에 굉장히 심리적으로 위축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이상이 없는데 이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고/ 또 성도들이 주중에 자기 교회를 출입할 수도 없고/ 이런 것들이 저를 위축시키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방역 수칙을 지키고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이 상황이 제 마음을 너무도 위축시키고 또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 이런 생각 앞에 한 없이 무력해 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텅빈 예배당에서 감정 조절도 안되고 허공을 바라보며 설교하는 제 모습 앞에 고통이 와 닿았습니다. 어찌 저만 이겠습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기침체로 인해 너무나도 힘든 때를 견디고 있고,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너무나도 힘들게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Ⅰ. 무기력한 인생 - 탈진
오늘 우리는 목이 말라 탈진 속에 있는 한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삼손입니다. 삼손하면 힘이 있고 대단한 존재로 일고 있지만, 그 역시 얼마나 연약한 인생인가를 만나 보게 됩니다. 그는 경건한 부모를 두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잉태되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통해 일생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있었고, 성령의 임재가 귀했던 구약 시대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육체의 힘을 받기도 하였습니 다. 그는 사자를 염소새끼 찢듯 찢어버릴 정도로 힘이 셌습니다. 마른 당나귀 턱뼈, 그 보잘 것 없는 뼈 하나로 천명이 넘는 불레셋 사람을 쳐 죽일 만큼이나 힘이 대단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육체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별게 아니지만, 힘이 곧 남자다움이었던 그 시대에 그는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으로 말하자면 그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땅에 굴러다니는 나귀 턱뼈 하나로 불레셋 군대를 천명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전쟁 역사상 찾아 볼 수 없는 엄청난 전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센 그였지만, 혼자 1,000명을 죽였으니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혼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입니다. 숨이 턱까지 찼을 것이며, 눈동자는 혼미하였고, 팔다리에 힘이 빠졌고, 정신은 가물거렸을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여기 ‘하나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손의 또 다른 위기상황을 봅니다. 그는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불 레셋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주의 은혜를 입은 것, 사실이지만, 몸 사리지 않고 자신을 던지다 시피했습니다. 지금 그는 승리의 이 현장에서 ‘목말라 죽겠다.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다.’는 절망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삼손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 직후에 심한 탈진에 빠지고 맙니다. 탈진을 영어로 'burn out'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 타서 없어진 상태' 말합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마슬로우'는 '약이 다 닳아진 건전지와 물이 다 증발한 주전자'에 비유했습니다. 이 탈진은 몸의 기력이 빠지고 마음의 극도로 쇠약해지고 영혼이 극도로 침체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탈진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희망과 의욕에 넘쳐서 열심히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갖기도 합니다. 헛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자기가 행했던 모든 일들을 부정하게 되며 그것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들을 다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삶에 회의가 오고 또 영적 침체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저는 자서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한두 권의 자서전은 다 읽어보셨을 겁니다.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진솔하게 써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에 프랜시스 탐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인생이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 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최용덕씨가 부른 찬양이 있습니다. - 1.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2. 지난 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약속했네. 아-멘
Ⅱ. 인생의 반전 - 기도
오늘 18절을 다시 보세요.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여기 이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삼손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기 ‘여호와’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문제를 쏟아 놓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라’는 히브리어로 ‘케라’(kera)라는 단어입니다. 특별하고 간절하게 마음을 쏟는 기도를 말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Cry out to me"(내게 울며 부르짖어라)로 옮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암담한 현실 앞에 울부짖어 기도할 때가 아닌가요? 우리 가정, 우리 조국, 우리 자녀, 우리 시대를 위해서 우리는 겸손히 엎드려 생사를 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인공지능(AI)로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우리 시대가 코로나19라는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팬데믹에 빠졌습니다. 그 작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멈춰 세웠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마비시켰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이런 위기와 공포의 세상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과학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탐욕이 멈추지 않는 한 제2의 코로나, 제3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지구촌을 위협에 빠뜨릴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우리 인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겸손히 회개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면초가의 상황을 만나도 아직도 열려 있는 하늘을 향해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순간 기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특권을 행사하며 하늘을 향해 나래를 펼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은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어느 정도 기도를 실천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현실을 넘어서서 살라고 기도의 날개를 주셨는데 언제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니신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니십니까? 우리가 종교 생활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그냥 기도할 뿐이지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내 짐을 대신 져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68: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짐을 대신 져 달라고 기도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어깨와 등에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짐을 지고 가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짐을 짊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게 되고, 보다 겸손하게 살게 됩니다. 때로 우리 어깨에 있는 그 짐이 우리로 하여금 거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살지 않고 세상을 거스려 살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Ⅲ. 엔학고레의 축복
자! 19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승리 뒤에 찾아온 목마름 속에 지쳐있는 삼손에게 하나님은 엔학고레의 축복을 주십니다. <엔학고레> 라는 말은 ‘부르짖은 자의 샘’ 이란 뜻입니다. 엔학고레는 삼손이 죽음의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축복의 샘입니다. 삼손처럼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십시오. 지금 삼손은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께 응답을 받습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샘이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이 자리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엔학고레의 샘이 터지는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축 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가진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살 것만 같던 우리의 삶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리를 힘들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는데도 가슴 아픈 일을 겪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삼손이 목이 말라 위기에 빠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게 하시는 은혜의 때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힘든 문제 앞에서, 내 힘으로 풀어낼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문제를 만났습니까? 그 문제를 그대로 갖고 하나님께로 나오세요. 얍복 나루의 야곱처럼 생명을 건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삼손처럼 부르짖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십시오. 지금 삼손은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께 응답을 받습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샘이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예배 드리는 이 자리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엔학고레의 샘이 터지는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엔학고레는 어디입니까? 어디서 우리의 갈증을 풀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엔학고레는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샘물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고통 받지 않기 위하여,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 대신 그분이 고통을 짊어진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할 진노를 다 짊어지고, 나 대신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다시는 내가 목마르지 않기 위하여, 다시는 이 고통의 좌절과 늪 속을 방황하고 헤매지 않기 위하여 내 고통과 내 절망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흘린 피가 생명의 생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의 고통을 안다 너의 눈물을 안다,/ 너의 좌절을 안다,/ 너의 목마름을 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보혈의 생수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이 생수를 마신 자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엔학고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우리에게도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풀지 못할 문제를 풀게 하시고, 내 힘으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말입니다. 오늘 우리 함께 기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