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6-13. 2021. 1/31 26.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택한 자녀를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침! 하나님은 예배로 모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반드시 질문을 하십니다. 자!! 인간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첫 질문의 음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은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는 단순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도 우리 인류에게 최초로 질문을 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Ⅰ. 너의 현 위치(주소)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아담을 부르시며 찾습니다."네가 어디 있느냐?"고. 여기 "아담아∼"하고 말씀하시는데 히브리말로 아담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아∼" 하면 "인생아∼"라는 말도 됩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현주소를 묻습니다. 이것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느 지경에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위치가 중요합니다. 제자리에 있으면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문제가 생기고 잘못됩니다. 제자리를 이탈한 아담 하나 때문에 모든 인류의 비극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군인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탈영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군에서 엄하게 다루는 죄가 두 가지가 있는데 ‘명령 불복종’과 ‘탈영’입니다. 전쟁 중에 탈영은 군형번 제30조에 의해 10년 이상 무기 또는 즉결처분, 사형입니다. 그만큼 군인들의 근무 이탈은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경계병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전 부대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담이 그 경계병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지금 누군가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고, 누군가는 그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반드시 죽게 됩니다. 무슨 변명이나 책임을 남에게 돌려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자리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선악과를 세워놓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만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먹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이 제자리를 망각하고 이탈한 행위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뱀 속에 들어가 역사한 사탄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한 말입니다.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시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자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게 바로 제자리에서 이탈한 겁니다. 8절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제 그들은 범죄함으로 하나님 품 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제자리에서 멀리 벗어나 버린 겁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 거역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해 주기를 바래서 그런 대답을 기다리며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변명과 핑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하고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나를 범죄케 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까? 여러분,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헤매다보면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탓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탓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원망이란 자꾸만 상승작용을 하여 하나님께 까지 올라갑니다. 원망하다보면 세상 탓하고 조상 탓하고 나라 탓하고 환경 탓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상태가 어디에 있습니까? 절대로 변명하던가 핑계하던가 책임 전가하는 그런 초라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Ⅱ.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비참함을 말씀합니다. (7-8)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 보세요. 그래서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한 첫 번째 행동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한 첫 번째 행동은 가리고 숨는 것이었습니다. 가리려고 한 이유는 수치심 때문입니다. 괜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숨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죄책감 때문입니다. 결국은 가리고 숨는 행위는 문제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합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그 문제에 대해 직면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초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결국 자신을 포장하고, 가면을 가지고 위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사탄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것처럼 인간이 죄를 지으면 마치 사탄의 속성과 같이 자꾸 숨기려고 위장합니다. 숨기면 살 줄로 아는데 사실은 숨기는 것이 불행을 가져오는 요인이 됩니다. 여러분 안에 뭔가 숨기는 것이 있거나 심지어 부부관계 속에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도 모르게 불안해 집니다. 상대를 경계하고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친밀함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숨기면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거주하던 에덴동산은 문자 그대로 ‘기쁨의 동산’입니다. ‘에덴’이란 이름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강물이 흘러넘치고, 온갖 열매가 가득한 풍요로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후 어떻게 됐나요? 저주가 임합니다. 3: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 관계의 갈등이 생기고, 남자가 여자를 존중하는 대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3:17절을 보면 남자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의 범죄 이전에도 에덴동산에서 경작하며 노동을 했지만, 그 때는 노동의 즐거움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목마름이 해결 되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모두가 잘 사는 것 같고 괜찮아 보이고 요즘 최 첨단의 과학의 혜택 속에 살지만, 자고 깨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잘 살아 보겠다고 힘쓰고 애쓰고 바동거리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죠. 게다가 별의 별 사건과 사고, 우환이 끊이지 않죠. 하나님 안에 있는 축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Ⅲ. 이는 한번 택한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영혼은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구원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신앙의 장애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영혼은 반드시 놓치지 아니하시고 꼭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해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다가오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이나 잠든 한 밤중에 찾아 오셨다면 그들은 얼마나 놀랬을까요? 태양이 뜨거운 폭염의 한낮에 찾아 오셨다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더위를 식히는 시간, 날이 서늘한 시간, 조용히 미풍이 부는 시각에 찾아 오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잔인하게 추궁하고 폭로하는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드러난 죄의식으로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이 제일 먼저 행동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3:21을 읽어보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죄인들에게 따뜻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인생이 안심하고 새날을 바라보고 일하고 활동하고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시는지요? 그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아실 뿐더러 우리의 삶의 모습을 사랑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 앞에 내 삶을 맡기십시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1학년부터이고, 구원을 얻고 목사가 된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안에 죄성이 작동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저는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냥 신앙 생활한 것이 아니고 열심히 했습니다. 신학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나름대로 좋은 목사가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많은 집회를 하고, 수없이 말씀준비를 하고, 좋은 책들을 읽고, 노력을 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욕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삶을 살아간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굉장히 끈질긴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내가 죄인이고, 그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1년만 다녀도 주일에 다 참여하면 52번입니다. 10년을 다니면 520번,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참회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20년을 다니면 1,000번입니다. 주일 한 번만 참여해도 천 번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수요예배에 새벽기도까지 포함해서 그 무릎 꿇은 시간, 찬양한 시간, 회개한 시간, 말씀들은 시간을 다 모으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악한 생각이 있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은혜가 떨어지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흡사한, 아니 능가하는 옛날 가락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맞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은혜를 한두 번 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조건을 찾으셨다면,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할 때도 조금이라도 사랑할 구석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주면 사랑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사랑을 이해해야 안 되는 노력이라도 할 것인데, 사랑이라는 반응과 감정과 이해가 전혀 없는, 아니 수준과 자격은 고사하고 반역을 일삼고 욕을 해대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소망 없는 나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연약하여(롬 5:6)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을 때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롬5:8)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로 있었을 때(롬5:10) 우리의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부어진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심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에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어떤 허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꾸짖지 아니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 있는 아담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이 전달되었을 때 그들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가죽옷을 받아 입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셔야 합니다. 이 가죽옷을 손수 준비하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에게 사랑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생명있는 짐승이 희생되지 않았겠습니까? 피 흘림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피 흘림과 사랑으로 지어진 가죽옷을 건네어 주는 하나님의 손은 사랑으로 떨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프로포즈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오기만 하면 ‘괜찮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손가락질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실패로 인해 부끄러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내가 도와줄게 힘내.’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바짝 다가 앉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