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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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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창 4:6-9) 2021. 2/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2-07 | 조회: 593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창4:6-9. 2021. 2/7

 

이번 금요일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구정을 맞게 됩니다. 설은 새해 벽두에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우리 민족의 고유의 명절입니다. 가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사람들, 가족이 있기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가족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번 설에는 5인이상 모임 금지로 모처럼의 가족 간의 설을 보내는 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코로나 19로 모든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중이 여기는 가족관계가 처음으로 깨어진 불행한 사건이 오늘 창세기에 나옵니다. 곧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에덴을 상실한 아담의 가정에 상상치도 못한 가정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8절을 보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입니다. 이때 다가오신 하나님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Ⅰ.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기 9절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아우라는 말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사는 형제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 공동체의 소중성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산업화 사회를 거쳐 4차 산업 시대의 길목에 들어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편리함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비싼 값을 치루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가정의 붕괴입니다. 행복해야 할 가정들이 많은 위기 속에서 불행의 아픔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클린턴 가드너’라고 하는 사회학자는 정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정이 있으면 아직 다 잃은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가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삶의 의미도 무너지고, 삶의 의욕도 무너집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담 하와 부부가 에덴을 상실하고 에덴을 쫒겨난 이 에덴의 상실도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1절을 보세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아주 기뻤습니다. 사실 에덴에서의 범죄 사건과 그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된 것이 자신 때문임을 알기에 하와의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와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그런데 가인이 자라면서 그 기대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벨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의 뜻은 ‘공허’ 혹은 ‘허무’입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때는 앞으로 그들에게 축복된 마음을 담아 자녀의 이름을 짓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허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아마도 큰 아들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이들에게서 그리 큰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둘째의 이름을 아벨(‘공허’)이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결국 가인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8절을 보면 형 가인이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살해했습니다. ‘쳐 죽였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 “죽였다”는 동사도 중요합니다. 보통은 “카탈”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할라그”란 동사가 쓰입니다. 이것은 매우 잔인하게 죽인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가인은 아주 잔인하게, 동생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까지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이 참혹한 현장에서 가인은 자신의 범죄를 아무도 모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인을 찾아와 묻습니다. “가인,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화목과 희망과 기쁨이 넘쳐야 할 가정인데 왜 반목과 질시 다툼, 그리고 심지어 살인이 일어나야 합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단어가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와 싸워 승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죄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죄를 다스리지(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형제살인입니다. 아담 부부는 자기 가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의 가정에서 벌어진 이 참혹한 사건으로 인해 아담의 가족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가정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편안함입니다. 하루 종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모든 긴장을 무장해제할 수 있고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수치를 느끼지 않아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는 수치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바깥에선 능력이 없고, 부족하고, 실수를 하고, 연약하면 모멸을 주고 수치심을 주고 그 수치심을 극대화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복음이 있는 가정의 특성은 내가 실수해도 받아주는 곳입니다. 내가 연약해도 품어주는 곳입니다. 여러 가지로 기준에 들지 않아서 부족해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 곳이 가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내쳐도 가족은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 그것이 안 됩니다. 이기심이 작동됩니다. 나 때문에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 중의 하나가 죄의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라고 하는 것은 교리적인 얘기고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들어가면 수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다 덮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인으로의 수치심, 정죄감이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묶여 있는 것을 자유케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안에 복음이 들어와야 합니다. 여기 가인에게 던지신 질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Ⅱ.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왜 이 형제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3-4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먼저 본문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서로가 다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음으로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 람이었음으로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모두 ‘자기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색이 변할 만큼 화가 났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6-7절에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또 하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 “네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가인은 삶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가인의 제물만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가인의 삶을 받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기쁘게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삶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아름다운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릴 우리의 영적 예배(합당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네 삶이 잘못되었잖아. 죄를 밥 먹듯 짓고서 하나님께 제사드린다고 하면 내가 그것을 받을 것 같으냐?’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을 책망하셨습니다. 가인의 잘못을 책망하셨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죄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가인에게 잘못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인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가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는 오늘 한 가지를 더 생각해 야 합니다. 살인한 가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Ⅲ.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인생살이에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버림받고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따뜻한 품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고된 삶을 반복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가인은 그 삶이 너무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고 그 때서야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13절에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자신이 범한 죄를 지니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기 가인의 이 탄식하는 절규 소리를 듣고 15절에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어, 어느 누구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해 주셨습니다.  비록 동생을 죽인 살인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에 그에게 나타나 두 번씩이나 경고해 주셨고,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 앞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을 십자가에 내놓으시기 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기 보세요.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16절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결국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갑니다. 여기 놋 땅은 방랑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는 방랑객이 되어 살아갑니다. 요일3:12-15절에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 그 마음에 끌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했던 인생, 끊임없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베푸셨지만, 결국 그는 은혜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이 아침!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번 금요일에 또 한번의 새해를 맞습니다. 이 새해 벽두에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 앞에 내가 챙겨야 할 가족에 대한 자세를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가정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퉁명스럽게 내뱉는 이 가인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중의 하나는 우리가 땅에서 만난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동생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돌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죽였습니다, 그나마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가족들에게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부모관계는 어떠며 형제관계는 어떻습니까?  최근 코로나19사태는 생각지 못했던 가정의 위기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코로나에 관한 한 보고서를 보면 평상시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 평균 90분 정도였지만 코로나19사태 이후에는 무려 15시간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부부간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부부갈등이 증가했고, 이것이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생기면서 ‘코로나 이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한 것은 부부관계 뿐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개학이 연기되고 온라인수업이 진행되면서 자녀를 돌봐야 하는 부모 특히 엄마들의 양육스트레스와 피로감은 한계치 가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사태의 장기화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압박이 심화되면서 소위 ‘코로나블루’라는 우울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심리적 어려움들은 가족들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코로나19사태 이후 가족들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족들 사이의 관계가 좋아졌습니까 아니면 더 힘들어졌습니까? 자칫 코로나19사태가 우리 가정에 생각지 못했던 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정이 크고 작은 위기에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정을 지켜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 기도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으로 잘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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