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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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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창 16:7-11) 2021. 2/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2-14 | 조회: 437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창16:7-11. 2021. 2/14. 주일 설교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본문 이전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종 엘리에셀에게 상속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아브라함과 약속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로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민족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또 흔들립니다. 때마침 아내 사라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자기 몸종 하갈을 첩으로 들이자는 것입니다. 당시 관행이 첩을 통해 자식을 얻으면 상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내의 이름으로 입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하갈을 첩으로 들였고, 하갈은 어렵지 않게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임신한 하갈이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주인이었던 사라를 멸시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의 아픈 상처를 건드립니다. 사라가 견딜 수 없어 아브라함에게 사실을 고하고 문제해결을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일체의 권한을 양도합니다. 사라가 하갈에 관한 모든 권한을 양도받았습니다. 분풀이를 하듯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하갈이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을 칩니다. 임신한 몸으로 대책 없이 광야 길로 도망을 칩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가 오셔서 8절에 묻습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기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Ⅰ. 우리 인생의 현주소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본문 8-9절을 보면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기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지난 날 범죄한 아담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아우를 죽인 가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께서 “네 아우 가인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몰라서 던지신 질문이 아닙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위치가 중요합니다. 제자리에 있으면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문제가 생기고 잘못됩니다. 제자리를 이탈한 아담 하나 때문에 모든 인류의 비극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속에 사는 고래를 육지에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크고 강한 고래라도 머지않아 죽고 말 겁니다. 반대로 사자를 물속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밀림의 왕자라도 죽고 말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남편의 자리에,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가정을 떠나 엉뚱한 데에 가 있으면 큰일 납니다. 학생은 학교에 있어야 하는 데 엉뚱하게 술집에 가 있으면 망합니다. 만일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온갖 문제가 생기고 비극적인 인생이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삭의 몸으로 아브라함이 살던 헤브론에서((창13:18) 이 광야의 샘물까지는 무려 잉태한 몸으로 160km를 걸었기 때문에 힘이 다 소진되어 대답할 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져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했습니다. 8절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자신의 신분을 똑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하갈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사라에게 복종하고 그 자리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동안 교만했던 것 사죄하고 그 집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도 깨졌고, 앞으로 살 길도 막막해 진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택한 자녀를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침! 하나님은 예배로 모인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반드시 질문을 하십니다. 주님의 두 가지 물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는 “네가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네가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입니다.

 

지금 하갈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뒤를 돌아보니 온통 자신의 과오가 많았습니다. 자신을 과신하였습니다. 자신을 과시하였습니다.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고 하여 자신의 신분이 바뀐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주인인 사래보다 더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가를 돌아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니까 자기의 감정대로 자기의 욕구대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묻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이제 하나님은 하갈이 가야 할 길을 점검하십니다. 하갈이 가는 인생의 방향을 물으십니다. 하갈에게 가야 할 길을 생각이라도 해 봤느냐고 물으십니다.

 

술은 이집트와 유대의 중간지대입니다. 하갈이 왜 이집트로 가려고 했을까요? 창세기 12:16에는 바로가 애급 여인을 사래의 여종으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애급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을 향하여 나간 것입니다. 술은 중간지대입니다. 아직도 반밖에 가지 못한 고향길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기진하고 죽기 전에 앞을 보게 하시고 더 이상 죽음을 향해 가지 못하게 말리십니다. 이 때 하갈은 자신의 갈 길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의 갈 길을 봅니다. 자신의 길에는 죽음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갈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분노를 삭이고,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보면 가는 길이 보입니다. 여기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Ⅱ. 우리의 인생을 살피시는 분임을 알게 해 줍니다. 7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여기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신 모습을 말합니다. 하갈은 지난 날 자신이 살았던 애굽을 향해 정처없이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몸은 만삭입니다. 지쳐 있습니다. 이 때 하갈의 마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그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라를 위해 몸종으로 오랜 세월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문을 위해 그 늙은 아브라함의 첩이 되어 아이까지 잉태했습니다. “이런 나를 이토록 학대해서 쫓아내다니...” 그 마음 속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교만했던 자기 태도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것은 두려움입니다. 이제 잉태한 몸으로 혼자서 광야 길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아이를 낳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광야의 혹독한 날씨, 광야의 들짐승들, 게다가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일단 사라를 피해서 도망쳐 나왔지만 이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만나주셨습니다. 하갈은 더 할 수 없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새 힘을 얻었습니다. 추스르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그 우물을 14절에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이 “브엘라해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란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창 16장의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아브라함 구원역사에 곁가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 15장과 17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는 이야기 속에 끼어있는 곁가지입니다. 없어도 되는 곁가지입니다. 믿음이 흔들린 아브라함 때문에 생겨난 불필요한 곁가지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이스라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곁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보살펴주셨습니다. 그 뱃속에 잉태된 이스마엘도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찮은 인생이라도 심지어 곁가지 인생이라도 살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자신을 곁가지라 생각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나는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따돌림과 깊은 소외감 속에 마음고생하며 살아온 분들이 계십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살펴주십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나를 감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지쳐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내 인생에 고갈 된 영혼에 생수를 부으시기 원하 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자를 친히 시야에 두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0:29-31에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 놀라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가 대략 10만개에서 15만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적게는 30개에서 많게는 100개 정도씩 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만개가 넘는 것이 계속 빠지고 새로 나고 해서 매일 그 숫자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에게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고 한 시도 눈을 띠지 않고 살펴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Ⅲ. 우리 인생에게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지금 잉태하고 있는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주셨고 나아가 그 아이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갈은 절망 중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록 자기를 학대하는 사라가 있는 곳이라 해도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사명이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자신이 어디서 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때는 정말 어리석게도 잘못 알고 악을 저질러 왔다는 것입니다.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할 정도로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하심으로 참아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잘못 살던 인생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기를 구원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사도의 직책을 감당케 하는 이 황홀한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신 하나님 앞에 적당히 살 수가 있습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 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예수 만나고 방향이 분명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력으로 또 한번의 새해를 맞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지금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지금 코로나 19는 언제 멈출지 모를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사망의 향기인 코로나는 온 땅에 사람들에게 무서운 두려움과 공포를 주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이 죽음의 향기가 인류를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향기인 코로나19로부터 우리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향기는 오직 생명의 향기인 예수를 온 땅에 드러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2021년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를’이란 교회 표어로 정했습니다. 너무 주변에 생명을 잃은 썩은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특히 우리 소중한 인생을 죽음의 향기인 코비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마냥 주저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 40:31에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으시고 내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곁가지같은 하갈도 살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본가지인 우리는 더욱 세심히 살피십니다. 우선 우리가 아픈 가슴으로 절망 중에 있을 때 말없이 살펴보시다가 브엘라해로이로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거기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제 주님 주시는 생수, 은혜의 생수, 말씀의 생수를 먹고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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