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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롬9:1-3. 10:1) 2021. 2/2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2-28 | 조회: 380
나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롬9:1-3. 10:1 2021. 2/28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예수 잘 믿는 다고해서 나라가 어떻게 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근심 걱정 없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만약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굉장히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자 불신자를 떠나서 한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 호라는 한 배를 타고 거친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지금 항해하고 있습니다. 선장이 실수에도 우리는 다 당합니다. 화재가 나도 우리는 크게 다 칩니다 빙하가 부딪쳐도 우리는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폭풍이 몰려와도 우리는 고생을 합니다. 다 우리는 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잘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다운 생각이 아닙니다. 잘 믿는 사람도 곤고한 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102주년을 맞는 삼일 운동은 이 사실을 잘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주권을 찬탈 당하니까 우리의 곱디 고운 누님들이 짐승만도 못한 일본군의 노리갯감으로 위안부로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하바드 대학에 어느 정신나간 교수가 쓴 논문에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을 하는 수모를 겪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100만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 교과서를 버젓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듯 통분하는 심정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어려움을 얼마든지 겪을 수가 있습니다. 내 가정에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나라 때문에 지도자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도 곤고한 날이 올 수가 있다’ 이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곤고한 날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기느냐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바울의 모습을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Ⅰ. 조국을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보다 책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감 있는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견딜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그 완악함과 그 더러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의 용서의 진액으로 사랑의 보혈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가슴을 안고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을 향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섬김과 희생과 봉사로 그들을 복음으로 끌어안습니다. 

Ⅱ. 민족이 하나 된 3.1운동 당시 3.1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역사 가운데 다시 찾아보기 힘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연합입니다. 만세운동에 온겨레가 다 힘을 합해서 참여했던 것입니다. 상해의 신한청년단이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민족적인 만세운동으로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이 운동이 과거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연합의 위대한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우선 상해에 망명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유학생들도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래서 미리 2.8독립선언 사건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삼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도 서북지역에서 시작하여 서울, 호남, 영남, 강원 등 전국적으로 퍼져갔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던 지역감정 문제를 뛰어넘어 하나를 이루는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다음으로 국내의 모든 정파와 세력들이 하나가 되어 참여했습니다. 후에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정쟁을 일삼게 되었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반상의 잔재가 남아있던 시기에 양반후손과 천민후손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남존여비가 사회 저변에 그 힘으로 작용하던 시기에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안에 남아있던 분열의 요소를 하나로 묶어낸 용광로와 같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더 중요한 것은 종교도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계가 앞장을 섰습니다. 당시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계가 일제에 큰탄압을 받으면서 일약 민족지도자로 부상한 남강 이승훈은 당시 최대의 종교였던 천도교와 불교 지도자들을 만너서 설득합니다. 저들이 흔쾌히 참여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민족지도자 33인 가운데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계 인사들이 나란히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왜 시위 날짜를 3월 1일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돌아가셨고, 3월 3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날짜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민족대표 33인은 이날 장례식에 참여할 사람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회의를 거듭하다가 자칫 폭력시위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서 3월 2일로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3월 2일이 주일입니다. 이 때 천도교에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고려해서 3월 1일로 앞당기자고 제안해서 3월 1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 삼일운동이 종파와 종교를 뛰어넘어 연합을 이루어낸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런 연합과는 점점 거리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정쟁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비판을 위한 비판, 그리고 내가 하면 로멘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상식이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념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 지역갈등 최근에는 남녀 성별사이의 갈등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치열한 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연합을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거룩한 뜻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Ⅲ. 저는 오늘 3.1절 102주년을 맞아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야 합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이 땅에 전파된 지가 고작 30여년 밖에 안 된 신생종교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인구 1700여만 명중 기독교인은 고작 22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은 전체 국민들 중 1.3% 밖에 안 되는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시위인원의 30%를 차지했고, 체포와 투옥된 사람들 중에 22%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들도 일제가 이런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끌려가 매를 맞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코로나 19로 수많은 교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가는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는 3차 대유행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차 대유행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코로나가 확신 되는 현상에 대해 국민들 절반 가까이가  교회가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교회가 사회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이런 따가운 시선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세상은 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고, 비판적이었지 않았느냐?’는 말로 뭉개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교회는 이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세상의 시각을 바꿔야 하고, 그런 현실 속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작년 말 12월에 ‘지앤리서치’란 조사 기관의 발표를 보면 교인들에게 코로나가 종식된 후 계속 교회에 출석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77%의 교인들만 계속 출석할 것이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3%는 가끔 교회에 나오든지, 아니면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리겠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고 지속적으로 교회생활을 해 갈 사람들이 점점 줄어가는 추세를 막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뭔가 변화에 대한 의지가 약해져 갑니다. 코로나는 길어져 가고, 기대 했던 꿈은 이제 무너진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해요,/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3.1운동은 온 민족이 고난 앞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당당하게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자신을 던진 희생의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신앙인들의 희생은 가여울 정도였습니다. 우리 동성 교회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소위 153운동을 제안 합니다. 1. 한분이 한 생명을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 운동이 일어나야 하고 5. 여러분 한사람이 5명의 끌어 앉는 중보 기도가 일어나야 하고 3. 일주일에 3일은 예배에 나와야 한다는 신앙의 새로운 각오가 서야합니다. 주일에 한번 나와서는 내 신앙 자체도 감당 못합니다.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대한민국 호가 제대로 항해를 하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지난 날 우리의 선배들이 지켜온 이 자유 대한민국을 재대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자리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 호는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너무도 큰 시련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전반적인 환경을 살펴 보면 마치 중환자를 수술대에 뉘여놓고 메스를 대는 그런 비상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웠고 북한의 괴뢰 정권과 피를 흘리면서 조국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 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이제 우리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 조국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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