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4-8. 2021. 3/14.
지난해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3월 11일에 ‘팬데믹’을 선포했습니다. ‘pan’은 헬라어로 ‘모든’이라는 뜻이고,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팬데믹을 선포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불과 1년 남짓 기간 동안 전세계 75억 인구 가운데 1억 1600만명이 코로나 확진에 걸렸고 이중에 260만명이 세상을 떠나는 충격적인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팬데믹이라는 말과 함께 ‘인포데믹’이라도 들어보셨습니까? 인포데믹은 정보를 뜻하는 ‘information’과 전염병을 뜻하는 ‘epidemic’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정보전염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인포데믹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해서 왜곡되어 전해지는 정보들이 사회에 넘쳐날 때 사용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로 쉽게 표현한다면 가짜뉴스들이 판을 친다는 것입니다.
지난 해 팬데믹과 함께 인포데믹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었던 이유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했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거기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가짜뉴스들)이 너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정보들이 무분별하게 유통되면서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가짜뉴스에 대응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SNS가 활발하게 사용되면서 그런 가짜 뉴스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최소 한두 개쯤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전염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가짜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정확한 사실파악을 하지 않으면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안심리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가짜뉴스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속을 때 짜릿한 쾌감을 느끼기 되고 어떤 경우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고서 그것이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거짓된 정보를 통해서 편을 갈라 자신과는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 자신에게는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짜뉴스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인 당시에도 가짜뉴스 앞에 쉽게 무너지는 도무지 상상이 안가는 행동을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요즘 말로 하면 모든 것을 다 체념하고 죽기를 청하는 모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엘리야입니다. 누가 이 사람이 엘리아라고 하겠습니까? 그는 누가 보아도 선지자중 최고의 선지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었던 그가 고독한 허무의 늪에 빠져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갈멜산 정상에서 승리를 외치던 그가 지금은 로뎀 나무 아래서 절망의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통해 부패하고 우상이 난무한 시대를 새롭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지명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디셉 촌놈이었던 엘리야가 어느 날 왕궁에 들어가 큰 소리를 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이 말 한 마디 외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엘리야는 이 일 때문에 전 이스라엘에 지명수배가 내려졌습니다. 아마 국왕모독죄에 괘심죄까지 적용되었겠지요?
이후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음식물을 갔다주면 금방 탄로가 날 것 같으니까 부정한 동물인 까마귀를 택배기사로 고용한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입니까?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국경 넘어 시돈 땅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는 양식 걱정하는 사르밧 과부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지명수배자로 양식 걱정하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단한 행군을 3년 동안 쉬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큰 영적인 전투를 했습니다.
이 사건 바로 직후에 이세벨로부터 협박편지가 날아든 것입니다. 이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그들이 의지하던 가짜신이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그러나 이 협박 편지는 엘리야에게 KO펀치와 같았습니다. 새 한 마리의 무게가 다리를 무너뜨린 것처럼 편지 한통이 엘리야의 인생 전체를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왔던 그가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이것은 바로 엘리야가 세상 소식에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의 부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 앞에 그동안 가졌던 믿음과 주님이 주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인생을 향해서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등불의 한 심지와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깨지면 참 회복이 힘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삶에 회의가 오고 또 절망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자! 보세요. 이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설득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에 탈진해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천사를 보내십니다. 너무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줍니다. 본문 5절에 "로뎀나무 아래서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여기 너무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줍니다.
어루만졌다는 것의 원래의 뜻은 영어 성경은 'touched' 라고 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접촉했다는 말입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고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그저 손을 내밀어 접촉하시며 어루만져주셨습니다. 마치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집에 와서 울다가 지쳐서 쓸어져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이의 머리와 몸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는 엄마와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음식을 줍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먹고 또 드러눕습니다. 일어나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냥 주저 않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얼마나 화가 나는 행동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또 그에게 다가가서 일어나 먹으라 하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더 이상 로뎀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그의 길을 이끌어 가십니다.
8절에 호렙산으로 그를 인도하시잖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산을 의미합니다. 시내산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입니다. 엘리야 시대로부터 6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고, 그와 만나 직접 대화하시고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던 바로 그 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던 그 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사명을 안겨 주셨던 바로 그 장소, 그곳이 하나님의 산 호렙입니다. 거룩한 그 장소, 바로 모세와 직접 만나주시고 그리고 모세에게 직접 사명을 주셨던 그래서 모세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던 그 장소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엘리야에게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9절에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3절에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How are you?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가 아닙니다. ‘Where are you? 너 왜 여기 있니? 너 왜 낙심하고 있어?’ 이것이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주의 음성은
Ⅰ.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엘리야에게 산에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의 좌절은 의외로 너무 쉽게 사람의 소리에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네가 왜 낙심하는 장소에 있느냐 어찌하여 너에게 낙심하는 상황이 일어났느냐” 이것은 엘리야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이 맡겨주신 사명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도 전혀 엉뚱한 곳에 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서 있습니다. 낙심하고 좌절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엘리야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바위를 부수고 산을 가르지만 그 바람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갈라졌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갈멜 산에서처럼 불이 떨어져 땅위 것들을 다 태웠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속에서 엘리야를 만나주셨습니다. 바위라도 쪼갤 것처럼 휘몰아쳤던 바람 같은 기상, 땅을 흔드는 지진처럼 격동했던 용기,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를 것처럼 활활 타던 정열,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는 뼈아픈 참회의 고백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로 부름 받아 바람 같은 기상, 땅을 흔드는 용기, 불처럼 타오르는 정열로 살았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바람처럼, 지진처럼, 불처럼 살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는 뼈저린 참회였습니다. 이 모두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13절에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웠다.’고 말씀합니다. 어찌 자신의 부끄러움을 옷자락 하나로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엘리야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내면세계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은
Ⅱ. 사명자로 세우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절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그 허무를 떨쳐버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 봅니다. 그러나 절망은 마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면 스스로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엘리야에게 “너는 다시 네 길로 돌아가라 그래서 내가 지시한 일들을 행하라”고 여러 가지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무엇이라 변명을 하며 자기를 정당화합니까? 14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게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엘리야 혼자만 남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합의 대신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굴속에 숨겨 두고 있다는 것을 사실을 엘리야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하고 말입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직장을 위해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은 없어’ ‘나는 복도 없는 사람이지’ 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다른 동료들과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과연 혼자입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기 예배하는 모두가 신앙의 동지들이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일구어 가는 동역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시험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나 혼자라는 생각입니다. 나만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따라 주지 않을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잠긴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많이 들어본 말 아닙니까? 엘리야가 바로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를 낙심케 했던 원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착각하지 말라. 너 말고도 바알에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의 선지자를 남겨 놓았다. 왜 너만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혼자 있는 것 같은 고독과 자기 연민 속에 있을 때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이렇게 많단다. 동성 교회의 목사도 있고, 중보적 기도사역자도 있고, 목장식구도 있고, 믿음의 식구도 있단다.”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뿐만 아니라 이 사건 직후에 그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엘리사를 만나게 하십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낙심에 빠질 때마다 찾아오는 가장 무서운 적은 혼자라는 착각과 자기 연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다른 동역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능력 많던 엘리야 역시 한갓 소문에 무너질 정도라면 우리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릿 시냇가에 오셔서 까마귀로 굶주림을 면케 하시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양식을 공급하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갈멜산에 불을 내려 거짓이 세상을 통치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 주님께서 로뎀 나무 아래 삶을 포기했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방의 왕을 세우게 하시고, 나라에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셔서 그 일을 넉넉하게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작년 코로나로 인해 쉬었던 사업장 심방을 다시 시작을 했습니다. 이 사업장 심방은 IMF때부터 시작을 했는데 이번 주간 한 사업장엘 갔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공장엔 기계가 멈춰 있었고, 직원들이 아무도 없고 내외분만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 앞에 가슴이 메여졌습니다. 평생을 공장을 경영하던 분인데, 이 코로나로 인해 한 동안 공장문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업장 심방을 계기로 공장을 다시 가동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만만치 않습니다. 현실이 힘들다보면 엘리야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이던 인생행로가 시간이 지날수록 험난해 지는 것을 목격하는 현실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저앉아버립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여기에 놀라운 지혜와 위로가 있습니다. 이 힘든 때를 사는 지혜는 우리 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소망입니다. 전7:13-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가짜뉴스가 판을 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어 들이십시다. 그 분 안에서는 형통이든 고낭든 아무것도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설혹 고난이 온다 할찌라도 주님이 주시는 날개로 훤훤 날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