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주 앞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늘상 가까이 하는 음식물은 오랜 시간 저장하다보면 변질됩니다. 이 때 변질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패’고, 다른 하나는 ‘발효’입니다. 식빵을 보관하다가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부패입니다. 먹을 수 없어서 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콩을 삶아서 으깨 만든 메주에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발효입니다. 이것을 원료로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간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부패와 발효를 우리말에서는 더 분명하게 구분하여 표현합니다. 부패를 ‘썩는다’고 하고, 발효를 ‘삭는다’고 합니다. 썩으면 악취가 나고,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독성분이 있기도 해서 먹지 못하고 버립니다. 그러나 삭으면 젓갈이 되고, 식혜가 되고, 김치가 돼서 그 풍미가 깊어집니다.과학적으로 보면, 이 썩는 부패와 삭는 발효는 모두 미생물에 의해 분해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분해 결과 우리에게 유익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라고 하고, 사용할 수 없거나 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라고 합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같은 과정이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유익하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도 살다보면 변합니다.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상황을 만나면 갑작스럽게 변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썩는 부패와 같은 변화가 있고, 삭는 발효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변화는 썩는 부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변화는 삭는 발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회심’이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절망적인 상태는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마른 해골 떼가 가득 찬 골짜기입니다. 바람만 불어도 가루로 날아갈 것 같이 마른 뼈들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른 뼈는 얼마나 심각한 상황입니까? 병든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고,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입니다. 변질이나 부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능성인 회심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 골짜기에 뒹구는 뼈들의 모습에서 죽음이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사건입니다. 일체의 희망을 등진 죽음의 상징은 마른 뼈일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었습니다. 국가는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사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날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간 골짜기에서 마른뼈들이 가득차 있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인 것을 알아채렸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접한 주전 580년경 이미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패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채 모든 희망을 접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환상의 골짜기에서 주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의외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3절에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에스겔도 얼마나 당황을 했겠습니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선지자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절묘한 제 3의 대답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였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뼈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말라도 너무 말랐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최악입니다. 1%의 가능성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의도는 이 뼈들을 살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정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보면 마찬가지 답변을 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을 살아갈 때, 영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많아지는데 이 세상에는 술집이 늘어가고, 우리가 전도한다고 사람들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안에 똘똘 뭉친 오만이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현대판 마른 해골골짜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비관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관적 낙관주의자입니다. 절망을 절망으로 결론을 내고 만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절망을 확인하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도록 하신 질문입니다. 어떤 최악의 상황도 최선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시작하느냐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그 상황은 한순간에 바뀔 수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까지가 전반부이고 4-10절까지가 후반부입니다. 전반부는 진단이고, 후반부는 처방입니다. 진단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른뼈처럼 이미 생명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후반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두 번 째 단락이 처방입니다. 과연 이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질문 속에 두 가지 처방이 주어집니다.
Ⅰ. 첫째 처방은 "주의 말씀을 대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첫 번째 명령을 하십니다. 4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막막하고 엄두가 안 납니다. 죽은 자들에게 전도하고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건대 호숫가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얼 마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일산 화장장이나 서울 추모공원 화장장에 가서 화장한 후 남은 그슬린 뼈들을 향해 전도하라고 하면 그것이 할만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몇가지를 약속하십니다.
5절에 보면 마른뼈에 생기가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6절에 보면 마른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마침내 가죽이 덮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7절에 보면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라고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순종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심을 따라 죽은 자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들려주는 바로 그 순간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기적을 주일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주일은 완전히 공동묘지에서 해골들을 향해 설교하는 심정일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입신중인 교우들이 적지않게 보입니다. 제 눈에는 그들이 마른뼈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주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니까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 선포가 진행되면서 여기 저기서 깨어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머리가 들립니다. 얼굴에 홍조가 돌아옵니다.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어떤 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입에서 찬양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끝까지 무표정한 시체로 들어왔다가 축도와 함께 다시 꼭같이 무표정한 시체로 나가는 분들도 없지 않아 눈에 띕니다. 이런 분들의 유일한 소망은 축도가 빨리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체들의 행렬 곧 상여 행렬사이로 살아난 성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배당에 들어 오실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성령의 빛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에 새 힘이 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보람 때문에 목회합니다. 저는 이 보람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일한 보람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생명은 신비합니다. 같은 씨앗이라도 생명이 있는 씨앗은 자라지만 생명이 없는 씨앗은 썩습니다. 생명이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봄이 오면 생명이 있는 것들이 바람이 불 때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일어나니 생명들이 반응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 생명의 부활이 있다면 말씀을 받을 때 반응을 합니다.
시들한 나무에 물을 주면 살아나듯이 주일에 말씀을 들으면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죽을 것 같이 괴로웠어도 주일에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할 때 비상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이 살면 죽어도 살겠고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내 안에 부활의 영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생명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 바랍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생기가 들어가야 산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들어가 생명이 되어 내 영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천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군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모습입니다.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휩쓸려 다니던 소망이 없던 뼈에 살갗이 붙고 뼈들이 맞춰지고 생명이 들어가 군대가 된 것은 부흥의 환상입니다. 지금 에스겔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이 질문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Ⅱ. 둘째 처방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10절에서 우리는 이 둘째 처방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말씀의 대언을 따라 마른뼈들이 맞추어 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입혀짐으로 사람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둘째 처방이 지시됩니다. 9절입니다. 이번에는 생기에게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생기가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되면서 동시에 생기 혹은 호흡으로도 번역될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이 처방은 죽어 있는 인간이나 혹은 죽은 공동체(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말씀 사역과 함께 성령 사역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순간이 완벽하게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는 순간인 것입니다.
본래 오늘의 본문은 바벨론 치하에서 생명이 끝난 이스라엘의 부활을 예언하는 환상의 드라마로 주어진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은 사실 마른뼈처럼 생명이 끝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회복 예언의 절정이 36:36입니다. 읽어보실까요?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것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전능하신 주께서 회복을 약속하시며 반드시 이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36:37을 주목해서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나 주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에루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회복의 방편, 부활의 방편으로 기도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중보기도)를 통해서 이 생명의 역사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13절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것이 부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야 할 2021년, 우리의 상황이 결코 희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우리를 위축하게 만들고,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장 큰 위협은 여전히 코로나입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기침체로 인해 너무나도 힘든 때를 견디고 있고,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너무나도 힘들게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에스겔이 보았던 절망의 골짜기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힘으로 맛서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현실 앞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봐도 우리의 힘으로 이 힘든 상황을 이겨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이 본 비전은 가장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는 꿈입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동성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의지하는지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직접 마른 뼈를 일으키시지 않고 에스겔을 세워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살게 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죽었던 자에게 “생기야 사방에 서부터 와서 이 죽음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라고 이 명령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갈망해야 할 것은 생명의 역사,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고,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내적인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내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마른 뼈와 같고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 내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변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이 땅이 예수의 땅, 소망의 땅, 부활의 땅으로 바뀌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살리는 영이신 성령이 내재하여 역사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날마다 충만하게 하시고, 주일에 부활의 공동체로 나올 때마다 기뻐하며 춤을 추고, 주님을 향해 찬양하고, 말씀을 받아 더욱 충만하게 살아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세상에서 복된 복음을 힘 있게 전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