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21:1-9. 2021. 3/2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날 벳바게에서부터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자 구원의 완성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개선장군이나 왕의 취임식 때에 이런 열광적인 퍼레이드가 열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나 군주들은 전쟁 승리의 기념으로 크고 멋있는 개선문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로마 콜로세움 광장 앞에 세워져 있는 ‘로마의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폭군이던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13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연합군과 싸워 이긴 오스테를리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거대한 개선문을 통해 승리한 개선장군이 들어 올 때 환영하는 인파가 거리를 메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렬은 그런 거대한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빛내줄 고위 관리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군사들과 전쟁포로들이 뒤따랐던 로마의 개선장군과는 달리 예수님의 뒤에는 12명의 제자들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개선장군들처럼 4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퍼레이드에는 오늘날처럼 최고급 차량도 없었습니다. 그저 작은 나귀새끼 한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온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은 각색 종류의 꽃가루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길바닥에 깔아주고 흔들어준 종려나무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위대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식에 쓰여졌던 사람들이 눈길한번 주지 않는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데 이 나귀새끼가 어디서 났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하라’는 이 말 한마디에 그대로 나귀새끼를 내어 주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무조건 없이 주님께 드린 한 무명의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는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가
Ⅰ.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Ⅰ.
2절에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여기 나귀 주인이 주님께 나귀를 내어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었고, 자기 전부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것입니다. 이 헌신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있지 않고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4-5절에 보시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한 한 무명의 나귀주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헌신이 무엇이고 내가 주님 앞에 쓰여지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한 20년 전인가요? 당시 참으로 모시기 힘든 참존 화장품의 김광석 장로님을 초청해서 우리 교회에 남성들을 위한 집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원래 간증 집회를 안 다니시는 분인데 우리 교회를 오셨는데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분을 모시게 된 동기는 당시 유명 출판사에서 낸 책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저자였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올라가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약대를 졸업한 후 을지로에 4평 짜리 약국을 개업했습니다. 밤마다 좁은 약국에서 피부병 약 연구에 매달리던 그는 피부병 특효약을 개발하고 피부병 전문 피보약국을 열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무허가 제약혐의로 보건범죄단속법에 걸려 검거대상이 되어 엄청난 빚을 지고 범법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전국 불자 평신도 회장으로 지낼 만큼 불심이 가득한 그가 5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마지막으로 찾은 양산 통도사에서 인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사찰 방에서 자신의 기사가 실린 빛 바랜 오래된 신문을 우연히 보면서 억울함과 답답함의 눈물을 흘리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석가를 찾아야 할 그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여기서부터 그 분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이 됩니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한 그는 56일간 구치소 생활을 마친 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기도 중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 그는 1984년 직원 10명과 함께 기초전문화장품 회사 '참존'을 설립하였습니다. 자신을 옥죄게 만들었던 당시 8억이 넘는 빚도 청산하고 화장품 사업을 한지 얼마 안되어서 스킨과 로션 등 기초화장품만 생산하던 참존은 드디어 국내브랜드 파워 1위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김 장로는 부채가 많은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꼭 드렸습니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며 중국 연변의 과기대, 미국 플러스 신학교에 100만 달러를 장학금을 보내는 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이 주신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주권 앞에 자신을 바쳤던 사람들은 자신이 쓰여진다는 것 때문에 감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쓰시도록 나귀새끼를 내어준 소박한 시골 농부도 있었고,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평생 준비해 두었던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아가씨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마지막 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었고, 그걸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내가 주님께 쓰임 받고 산다는 것 이것은 황홀한 감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고위직이 약 3,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나 뽑나요, 개인 신상을 다 봅니다. 그리고 인사 청문회를 통해 검증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어떤 직책을 받아 임명된다면 개인뿐 아니라 가문의 큰 영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 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쓰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나를 주께서 쓰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이 자부심이 없이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온 땅에 펼쳐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일제시절 어느 장로님은 신사참배를 주위에서 자꾸 권하자, ‘아, 내게서 향기 대신에 얼마나 더러운 악취가 풍기기에 이처럼 내게 파리 떼가 끓는가?’ 하며, 그래서 더욱 자신의 믿음의 생활을 가다듬고 그 고비를 이겨내었다고 합니다. 지금 ‘주가 쓰시겠다’ 할 때,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Ⅱ. 순종입니다. 본문 3절 보십시요.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여기 ‘즉시 보내리라.’ 이는 말씀에 대한 자세입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생각, 방향, 의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용기를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불리워지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에게 고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데, 얼마나 사랑하는 아이인데, 우리말로 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아닙니까?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더군다나 그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어쩌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날 밤 뜬 눈으로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22:3) 아침 일찍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은
Ⅲ. 자기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입니다.
2절에 보시면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이 ‘매여 있다’는 말은 아주 재미난 단어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완료 분사로 마치 나귀가 자기를 풀어 가도록 기다리며 매여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행20: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매여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것이 온통 주님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처음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의 사랑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더 깊이 주의 사랑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바울은 온통 주의 사랑에 매여 살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살면서 무엇인가에 매여 살아갑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주께서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쓰일 땐 풀렸던 것들도 묶여질 수 있습니다. 기회도, 명예도, 건강도, 물질도 주께서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 주님이 쓰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지 않으면 결국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 됩니다.
여러분! 이름 없이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던 이름 없는 한 시골 농부와 자신의 전부를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이름 없는 한 여인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승까지도, 주님까지도 팔아먹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어느 쪽 사람입니까? 이름 없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종으로 오신 예수란 제목으로 한주간 교회에 오래 오래 머물려고 합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해서 다시한번 내 신앙의 회복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코로나 19로 작년에 성례식을 1년 동안 못하다가 오늘 감격스러운 세례와 성찬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 3가지가 있는데 ①말씀 ②기도 ③그리고 성례입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예식입니다. 이 설교 후에 바로 시행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