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리고 그 이후 - 엠마오① 눅 24:13-17. 2021. 4/11.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진정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라 말합니다. 그는 이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요? 돈을 잃었거나 명예를 잃어서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절망, 즉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란 자기의 상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절망에 이르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인간은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자,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는 자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코로나 불루 입니다.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로,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합니다.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많은 가정에서 가족 간의 불화가 일어나고, 아동학대나 이혼이 늘었습니다. 청년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울증 증세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100만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이 총체적인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부활의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그 은혜, 그 감격을 잃어버린 채 사는 성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중에 우리 스스로 성도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채로 오늘을 살고 계신분이 계신가요?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가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경험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여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15차례 두려움에 떠는 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친히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다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빈 무덤을 보았고, 그런데도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의심을 갖고 있었고,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어디 제자들만의 모습입니까? 오늘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들도 그런 모습으로 산 적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때 양심을 통해서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너무 자주 실수하며 실패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은 우리가 삶 속에 경험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실망하여 엠마오를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쯤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두 제자가 실망과 슬픔에 젖어 황혼녘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기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발걸음 -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모든 인생들의 방황의 발걸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엠마오"라는 말은 원문에서 "모른다.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엠마오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여기 내려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길이었습니다. 17절에서는 이들이 "슬픈 빛"을 띠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엠마오 길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뭐, 그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들이 사랑하고 따랐던 그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인자하시고, 그렇게도 자기들을 사랑해 주셨고, 그렇게도 좋은 분이셨는데 그분께서 그렇게 끔찍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니... 그 충격과 그 안타까움에 이들 마음이 며칠이 지난 지금도 슬픔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들의 앞 길 때문입니다. 그토록 의지하고 따르던 주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셨으니 이제는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뭐하며 살 것인가? 고향 사람들 그들이 자기들을 뭐라고 말할 것인가? 앞날을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그 또한 슬퍼집니다. 한 마디로 본문이 그려주는 두 제자의 모습은 희망을 잃은 사람들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스페란스란 말은 희망한다, 소망을 갖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희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주님을 불과 며칠 사이에 다시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변형되었기도 했지만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누가가 지적하듯이 마음의 눈이 닫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 마음의 눈이 닫히게 됩니다. 폐쇄적이 되고, 소극적이 되고, 모든 것을 어둡게만 봅니다. 세상 만물을 그 어두운 그림자만 보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닫힌 사람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어찌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들만의 문제겠습니까? 지금 코로나 19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내리막길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실망하는 뉴스를 많이 대하게 됩니까? 약물 중독에 빠지고, 도덕성으로 한없이 타락하고, 갈지 자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참 안타까운 마음을 느낍니다.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 하고 사는 사람들도 세상의 풍랑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 내리막길 인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Ⅰ. 그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5절에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여기 동행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 누가 동행했다고 합니까? 예수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 앞에 무릎꿇은 예수가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주님 정녕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중에 우리 스스로 성도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채로 오늘을 살고 계신분이 계신가요? 사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순간부터 그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심’은 그분의 약속이었고 습관이었습니다.
막3:14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그렇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택하심의 목적이 ‘함께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지상 생애 마지막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택한 나를 결코 포기하거나 놓치지 않으시는 그 주님을 지금도 나를 찾아 헤매고 다니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포기한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이 포기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 아무리 힘든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죽음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그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Ⅱ. 열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32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 “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는 이 엠마오 제자에게 열정이 생긴 것입니다. 이 열정 앞에 두 가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눈이 밝아졌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라고 말씀했습니다. 앞의 16절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다가” 여기 ‘눈이 가리워졌었는데’ 이제 그 가리워졌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말을 '디아노이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연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엠마오로 낙향을 하던 도중 그들의 눈은 무엇엔가 가리워져 제대로 볼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눈이 활짝 열려 봐야 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삼손을 아시나요? 그 능력의 삼손이 여인의 무릎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한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눈이 뽑힌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놋줄로 묶고 연자 멧돌을 돌리게 하는 무기력한 인생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119: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는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둘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본문 32절을 보면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32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 원인이 바로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할 때 그 눈을 열어주신 것처럼 이번에 주님께서 성경을 열어주셔서 그 뜻을 깨닫게 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이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다 그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열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Ⅲ. 사명의 회복
본문 3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 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여기 희망을 잃고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순간 이 두 사람은 마음이 급했습니다. 다시 자기들이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던 자리로 가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그 밤에 달려간 곳은 그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온 곳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려 떠나왔던 곳, 그곳에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희망을 추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그 형제들, 그들이 뒤로 하고 온 그 예배처, 그들이 잊고 있었던 맡겨진 사명들... 그것들이 다시 희망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흔들림이 없는 부활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질랜드에 Takapu절벽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이었습니다. 이곳은 절벽의 비경도 아름답지만, 절벽 바로 아래 큰 바위에 수천 마리의 갈매기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장관 중에 장관입니다. 그런데 이 갈매기들이 태풍이 불 때 대처하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여러분도 태풍의 무서움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강풍 속에서 그 조그만 갈매기들은 어디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갈매기들은 한 마리도 예외 없이 모두 태풍이 불어오는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몇 마리는 태풍을 가슴에 안고 날아오르며 태풍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태풍에 새들이 휩쓸려 가 죽었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쳐 집채가 날아가도 새들은 끄떡없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들 이런 태풍이 불면 본능적으로 피할려고 하지 않습니까? 조류 학자들이 밝혀낸 것은 그 비결은 태풍을 마주보는 것이랍니다. 태풍을 마주보는 한 절대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태풍이 새들의 날개쪽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그러나 만약 태풍을 피하기 위하여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엉덩이를 갖다 대면 영락없이 휩쓸려 버리고 만답니다. 저는 태풍 속에서 쓰러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태풍을 마주보며 태풍을 즐기고 있는 갈매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칙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 신앙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5: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 속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절망 중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향하던 제자들을 돌이켜 세운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절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승리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어 포기했던 일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절망했던 그 자리를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새로운 능력을 덧입게 되시기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두 제자의 뜨거워진 마음처럼 부활 신앙 가지고 영적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