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리고 그 이후 - 제자들③ 요21:1-7. 2021. 4/25.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고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을 받고 얼마 후에 그 사람은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습니다. 그가 깨어나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큰 상처로 인해 머리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온 몸이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의사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환자분은 교통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고 당시 뇌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기억상실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느냐?’고 묻자, 의사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칫 기억을 되살리려다가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환자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시력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동일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시력을 잃더라도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더라도 시력을 갖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남자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과거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지금 이 순간부터 앞으로의 남은 삶까지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계속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남자의 말에 공감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거의 삶과 경험이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의 실수나 잘못을 우리는 바로잡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과거가 ‘닫혀진 문’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열려진 문’입니다. 꿈을 꿀 수 있고, 도전해볼 수 있고, 새로운 뭔가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 미래가 모두 희망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과거의 풍요나 행복보다는 미래의 희망과 기대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열려진 문인 내일을 희망하며 살았는가?’ 아니면 ‘닫혀진 문인 과거만 회상하며 과거에 사로잡혀 살았는가?’하고 말입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한 질문은 ‘나는 지금 내일의 희망을 품고 설레는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과거에 내가 세워놓은 업적이나 공로에 사로잡혀 지난날의 나만을 추억하며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디베랴 바닷가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6명의 사람들은 3년 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과 직업, 심지어 가정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난 날의 꿈도 열정도 희망도 다 사라졌습니다. 미래를 향한 그들의 꿈은 온데 간데 없이 과거로 돌아가서 고기잡는 어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에겐 낙심과 좌절에 찌들은 모습입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이들에게 두차례나 다가 가셔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은커녕 낙심에 젖어 자신들이 지난 날 살았던 고기잡이 직업으로 그물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패자요 패배자들입니다. 한때 주님 쫒겠다고 가정도, 배도 그물도 던진 저들이지만, 이젠 다시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난 날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겼던 그 가치를 버리고 이젠 고기잡는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밤샘을 했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다시 끌어올리기를 반복한 것은 중노동 중의 중노동입니다. 지금 그들은 매우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뜻밖에 주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가갔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른 새벽, 그것도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떡과 생선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그 음식물에 감히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우두커니 있는데, 주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떡을 가져다가 주시고 또 맛있게 요리한 생선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단락의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라면 이 최후의 극적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지, 우리 각자 이 상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수하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 주님 앞에 사람이라고는 11명의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란 베드로를 제외한 10명의 나머지 제자들을 뜻하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10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보다'란 단어 우측 상단에 ’2'란 숫자가 붙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아래쪽 주 난을 보면 2번에 ’혹 이것들보다'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키는 ‘이것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자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를 의미합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방금 잡은 생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아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헛 그물질만 하던 갈릴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이 공허한 갈릴리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과의 약속을 망각하면서까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던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곧 썩어질 이 소유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팔을 벌려 이 세상을 가리키시며 물으셨습니다. ― `네가 공동묘지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덧없는 세상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앞에 서시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며 불끈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시면서 묻고 계십니다. ―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신앙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b)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 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고 이젠 실패의 자리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면 또 감정이 앞선 영웅적인 고백입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베드로는 바로 이 시점부터 한 생을 변함없이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이토록 엄청난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이는 베드로 앞에 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그가 밤이 맞도록 생존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통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지금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내가 이제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노라'고 3번씩이나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고백 앞에 믿어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보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도대체 이들이 제대로 배우기나했나요? 가진 것이 있나요? 있는 것은 고집만 있고 자기감정에 안 맞으면 반항하기 일쑤인 이들이 무슨 희망이 있기에 또 끌어 앉으신다는 말입니까? 보세요.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은 주님의 양을 맡기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이 어디 있나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짝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느라 하나님께 눈길도 한 번 안 주는데,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우리를 못 견딜 만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호소하고 계신 것일까요? 대체 우리는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사랑에 이토록 무심할까요? 하기야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것 봤습니까? 부모는 버림받아 시설에 있으면서도 밤낮 자식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아내가 저에게 무엇을 할 때 가장 고마운가? 요리, 안마, 이런 것보다 몇 백 배 더 고마운 것은 저를 믿어주는 겁니다. 제가 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너무나 믿어줍니다. 암으로 고생한 이후에 참 저 하나만을 믿고 따라 준 아내에게 잘 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목회 잘 할 수 있어. 당신은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어!" 라고 믿어줍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지식이 많은 부모,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면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의 부모님들은 농촌에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유학 보냅니다. 아들이 가끔 거짓말을 합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책을 사야 합니다. 쌀을 팔아 부치세요." 그 돈을 받아 아들은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시골의 부모는 전혀 모르니까 공부하는데 이렇게 돈이 드는 줄 알고 쌀 팔고, 밭 팔아서 도와줍니다.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의 지성으로 계속 오는 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회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대장부가 됩니다. 믿어 주었습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루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믿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 해변의 만찬은 그 어떤 시간보다 희망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기쁨이 일어나는 꿈을 갇게 하는 회복의 현장입니다. 자!! 밖에는 동녘의 여명이 밝아오고 부활의 그 광채는 해변가를 비취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역사는 배신과 상처투성이인 제자들의 패배를 잊게 하고 다시 사명의 현장으로 향하게 하는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늘의 꿈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혀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희망을 갖는 것이 믿음입니다. 꿈을 꾸되 세상의 허황된 것을 꿈꾸지 않습니다. 비전을 갖되 세속적 가치를 따라 얻어지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보다 큰 세상,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에 내 삶을 맡기며 삽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좀 실수도 덮어주고 그리고 끌어 앉아주고 용기를 줄 줄 아는 곳,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어머니
품 같은 교회만 오면 가슴이 뭉클 해지는 곳, 아무리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어도 내가 받은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섬길 줄 아는 표용력이 있는 현장, 이곳이 바로 부활의 현장입니다.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식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