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부모 평안하십니까? 엡6:1-3. 2021. 5/9
5월의 신록이 깊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요, 꿈과 희망의 계절이며,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분들은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속 썩여 드린 일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 속에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또 삶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실패와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 끼쳐드린 것 등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이 생각날 것입니다.
요즘 사회학자 가운데 에이지퀘이크(agequake)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이라는 ‘age’와 흔들린다는 ‘quake’를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예를 들어 지진을 영어로 어스퀘이크(earthquake)라고 하는데 땅이 크게 흔들린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에이지퀘이크란 말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연령 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특히 인구의 고령화에 따른 사회 경제적인 충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생겨난 말입니다. 노령화 사회현상이 촉진되면서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사회 보장 문제가 최대의 사회 현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논의되기를 기피하고 있는 최대의 숨겨진 또 하나의 사회 현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위 노인 학대의 문제입니다. 어느 기관이 조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 무려 10%에 가까운 노인들이 그들의 자녀 및 가족원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 가정생활의 새로운 진단을 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바울이 살던 시대는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 못지않은 급격한 윤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기존 전통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모와 자녀사이의 전통윤리에도 상당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가정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바울사도는 소아시아의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던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외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중에 효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효에 대해서 1-3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효를 해야합니까?
Ⅰ. 첫째,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은 지극히 옳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것은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기본 원리를 세우신 것처럼 인간 세계에 기본 원리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희생하고 자식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세계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부모가 나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사랑을 쏟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시고기와 논바닥에 사는 우렁이를 아실 것입니다. 부성애가 강한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 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숫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죽은 아비의 사체를 다 뜯어 먹습니다. 그렇게 다 주고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살을 깎아 먹이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게 될까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그들은 우리 인생의 울타리이십니다. 그 울타리 안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분명 부모님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Ⅱ. 둘째,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 잠23:22절에 나오는 ‘경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경히 여기지 말라 말은 부모님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세월이 지나가면 옛날의 모습이 아닙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노년기를 지내면서 노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노년은 상실의 삶이다. 건강, 돈, 일, 친구 그리고 꿈을 잃어버리는 삶이다" 노년은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시기입니다. 실제로 늙어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마치 빗살이 하나 둘씩 잘려져 나가듯이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노인들 곁을 떠나갑니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떠나갑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먼저 하나님 나라로 떠나갑니다. 평생을 사랑하며 살던 아내와 남편이 곁을 떠납니다. 이제 외롭게 남은 빗살 한 가닥처럼 홀로 남은 세월에 그 깊은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손들과 떨어져 살고 있고, 갈수록 혼자 사는 비율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와 학대 속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 중에서 "노인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박물관 하나가 불 탄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상실감이 깊어지는 때에 자식들의 조그마한 배려는 소망의 끈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십자가의 그 고통의 한 복판에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두 팔을 벌리신 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바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긍지의 대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사람들로 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처럼 긍지를 갖고 계셨기에, 비록 주님께서 어머니와 떨어져 사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이 긍지로 인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며 당신 모친의 여생을 간절하게 부탁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효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비정상적인 세태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제5계명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 부모님을 향하여 주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긍지로운 고백의 삶을 시작치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바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3절에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효자 요셉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룻도 비록 이방나라인 모압 여인이었지만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잘 공경한 효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축복하심으로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결국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잠언 1:8-9을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머리에 아름다운 금 면류관을 쓴 것과 같고 목에 금사슬을 건 것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노인 학대의 이야기을 언급했습니다만 가장 잔인한 부모 학대, 노인 학대는 부모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암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한 의사는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자신의 불효 때문에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리곤 합니다. 그는 종종 재래시장을 찾곤 하는데,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는데, 막노동을 하던 중에 철근에 깔린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을 캐고 다듬어서, 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외동아들인 자기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절뚝거리면서 교실로 찾아오셨습니다. 친구들이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어머니셨습니다. 그 후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가정도 이루었다. 처가에서 병원도 개업해 주고, 너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잊고 살았습니다.
솔직히 잊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찾아뵙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절뚝거리는, 허름한 옷차림의 할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대뜸 모르는 노인네라고, 가정부에게 쫓아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면서 기침을 하고 계셨습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자식이 효자라고 자랑합니다. 서울에서 유명한 암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자랑을 하면서 당신은 자식 신세 질 수 없어, 이렇게 혼자 사는 것이라고 변명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시장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는데, 늘 계신 그곳에는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집에는 선생님 혼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아들에게 돈뭉치 보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혹시라도 아들이 잘못됐을 경우,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좌판떼기 하면서 모아두신 돈이랍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셨다는 말과 함께……. 그 돈을 건네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마침내 제자의 과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막노동을 하시던 부모님은, 퇴근길에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를 발견하고, 자식이 없던 터라 얼른 입양을 하였습니다.
어린 그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서 항상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것을 보고, 부모님은 같이 몸을 던지셨다.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어머니의 다리가 다치고, 벌이도 시원치 않자, 사람들은 그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습니다만 어머니는 그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키우셨습니다. 그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는데, 그것을 알고도 학비를 대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알고는, 아들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물어물어 찾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너무 많아서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울면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느라고 흘리신 땀과 눈물을 모은다면 목욕을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효도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맘때가 되면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양주동 선생님이 작사하고 이홍렬 선생님이 작곡한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입니다. 노래 가사를 전하고 싶은 까닭은 혹시라도 잊은 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저와 함께 노래를 불러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버이의 정성은 그지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버이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아낌없이 일생을 자녀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버이의 사랑은 지극하여라/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겠습니까?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겠습니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겠습니까? 어버이의 희생, 어버이의 정성, 어버이의 사랑보다 더 넓고, 높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