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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모델하우스 (행10:1-4) 2021. 5/30. 주일 예배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5-30 | 조회: 400
신앙의 모델하우스 행10:1-4. 2021. 5/30. 주일 예배

 

여러분 가운데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 혹은 아파트를 사지 않는다고 해도 구경삼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델하우스에 한두 번은 들어가 보았을 겁니다. 불과 십 수년 전만 해도 모델하우스라는 것이 없었어요. 아파트를 사려고 가면 기껏해야 설계도와 조감도 정도를 그려놓았는데, ‘이는 당신이 살 집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라고 그림으로 그려놓은 거예요. 그 위에 조금 더 발전해서 아파트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형을 만들었어요. 견본으로 성냥갑만 하게, 또는 박스만 하게 만들어서 당신이 살 집의 방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예 그럴 필요 없이 모델하우스를 다 지어 놓았습니다. 이곳에 가보면 자신이 살 미래의 집을 100% 현실로 볼 수 있어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방, 마루, 부엌, 화장실 등등... 자기가 살 집을 그대로 100% 지어 놓은 것이 모델하우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사기 전에 모델하우스에 가보면 환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어요.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이제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우리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었으면 좋겠나를 고민하며 우리가 이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 믿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는데 어떻게 해야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꽤 오래 다니고서도 신앙생활에 대한 그림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저는 그러한 분들을 위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신앙의 모델하우스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분명한 그림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소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설명할 때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모델하우스를 보여주듯이 ‘너희들이 이렇게, 이런 태도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라고 하며 한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고넬료입니다. 그의 출신은 이달리야 사람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2절에서 단정적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의 삶을 세 가지로 특징짓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백성을 많이 구제했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고넬료가 백부장의 위치를 가지고 식민지 백성들을 학대한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로마에서 백부장은 그렇게 높은 위치가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백부장은 그 당시 위치로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가장 높은 계급으로 로마로부터 파견된 사람이 천부장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통째로 다스리는 이 천부장 바로 밑에 있는 계급이 백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위치 아닙니까?

 

부모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은 고넬료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않은 고넬료가 이방 지역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축복을 누렸을까요? 당시 이 고넬료의 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행10:22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얼마나 근사한 가정입니까? 여기 ‘의인’이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했다’ 이는 사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고넬료의 가정을 돌아보며 그가 가졌던 신앙의 태도와 삶이 어떠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고넬료 가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정이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외’의 원어 뜻은 “공경하다. 존경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존경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예배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공경하니까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33절에도 보면 고넬료가 자기 집으로 베드로를 초청해서 만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중간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통해서 듣게 되는데,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으려고 하나님 앞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온 집안과 더불어” 고넬료는 부인, 아들, 딸과 더불어 온 식구들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겁니다. 혼자서 개인적으로 예수를 잘 믿을 수는 있어요. 남편 혼자 잘 믿을 수도 있고, 부인 혼자서 잘 믿을 수도 있어요. 부모만 예수를 잘 믿을 수고 있고, 자녀들만 예수를 잘 믿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예수님을 잘 믿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자신과의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잘 믿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자신만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와 종들과 친척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고넬료 한사람이 예수를 믿으니까 그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바르게 들으면 성령의 임재와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말씀을 들을 때 병 고침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우리의 삶에 가로막혀 있는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Ⅱ.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절에 보면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여기 구제는 '착한 행실'을 의미하는데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귀족입니다. 지체 높은 권세자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나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 유대나라, 피식민지 백성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많이 구제했다는 것은 어떤 특정 개인을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틴의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구제는 하나님께 기억되는 구제였습니다. 31절에 보면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가 베푼 구제는 눈가림이나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구제를 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신행일치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입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가자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그 마을에서 한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피부는 한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고서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그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지구촌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가난하다는 말조차 하기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가난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외면하곤 합니다. 가난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하고, 가난하고 힘들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곤 합니다.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생기는 정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초월하는 힘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상대방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내 것을 나누게 됩니다. 누굴 위해서 희생할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한 모습입니다. 고넬료는 노예들까지 배려했습니다. 관심을 가졌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까지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둔군 장교임에도 군림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자녀들이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Ⅲ.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성경학자는 고넬료의 집은 두개의 창을 열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웃을 향한 창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구제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열린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은 하늘을 향한 창 곧 기도의 창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2절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가 정상적인 성도의 삶을 산다면 기도의 삶을 피해 갈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고넬료의 기도의 삶을 의식적 차원에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항상 기도하고 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기도가 곧 그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3-4절에 보게 되면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하루는 제 9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그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자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자만 보내서 부족하니까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를 그 가정에 보내십니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와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특별하게 보내주셨나요? 그 이유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보시기에 고넬료의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의 기도를 받으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던 베드로는 이 가정에 세례를 줍니다. 이때  모든 식구가 이방인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넬료가 성령 받고 은혜 받고 나니까 그 가정은 세계 선교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직접 세계 방방곡곡에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방인인 그가 성령충만함을 받은 그 사건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담대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고넬료 가정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결국 그의 집을 구원하고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까? 이 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는 식민지의 주둔한 권력자입니다. 얼마든지 사람들을 갈취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권력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기는커녕 백성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세속적인 언어보다 늘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언어입니다. 항상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달 동안 가정에 대해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의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걱정이 많습니다. 이러다간 교회 학교에 자녀들이 모이지 않는데 하는 우려가 많습니다. 저는 이 코로나 19가 일어나는 기간 동안 쉼을 그 어떤 해보다 많이 가졌습니다. 그 기간에 특히 코로나에 관련된 서적을 여러권 보게 되었는데 참 놀라운 것은 오히려 이런 어려움을 보내는 동안 교회가 다시 부흥을 경험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로마가 무너지는 시기에 로마에 역병이 일어나 로마가 무너지기 시작을 했는데 이때 기독교가 어마어마한 부흥을 경험을 하게 됩니다. 14-15세기에 유럽을 휘쓸었던 역병으로 당시 셰계 인구 4억 인구 1억이상이 죽음. 그 때 신앙의 희의론자가 많았는데 오히려 기독교는 그냥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계기 그것은 바로 가정의 회복이었습니다,) 이 가정의 소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역병이 일어날 때 다 무너질 것 같았는데 그 때 마다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이 코로나 19 기간에 가정의 회복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공부 많이 시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최고의 유산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내 자녀들, 내 손주들도 사랑하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가정처럼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일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이 신앙의 모델하우스로 세워져 가고 있는가 우리 깊이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바로 서는 자녀들은 어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을 우상의 자리에 올려놓지 말고, 우리 자녀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책임적으로 감당하는 건강한 신앙인이 되도록 양육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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