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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가질 힘 (삼상17:45- 49) 2021. 6/13. 창립 주일 52주년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6-13 | 조회: 398
교회가 가질 힘 삼상17:45- 49. 2021. 6/13. 창립 주일 52주년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52주년 기념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52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코로나19사태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도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의 1년 반이 넘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어려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주신 사명을 믿음으로 잘 감당을 해왔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다섯 가지 교회의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둘이 ‘교육과 훈련’을 제자를 세워야합니다. 셋이 ‘선교와 전도’를 입니다. 넷이 ‘교제와 친교’입니다. 다섯이 ‘섬김과 봉사’입니다. 코로나사태 이후 대부분의 이런 기능들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역동성이 떨어지게 되었고, 장기간 방치된 빈 집처럼 갖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는 창립 52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위기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과 싸움을 하기 위해서 엘라 골짜기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엘라 골짜기'라는 말의 뜻은 '상수리나무의 골짜기'란 의미로 유대나라를 가보시면 알지만, 이런 숲이 흔하지 않습니다. 이 엘라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한 곳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겉모습뿐이지, 그 속에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깔린 곳입니다. 이 골짜기에는 팽팽한 힘의 대결이 있었고, 40여 일간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증오의 힘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힘이 있었습니다. 불안과 죽음의 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블레셋과의 전쟁이 치열했던지 이스라엘 왕인 사울 왕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 할 정도였지만,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계속 밀리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군대에 전쟁에 능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골리앗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골리앗은 키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약 3m에 달하는 거인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갑옷의 무게만도 57kg에 달했고, 베틀 채 같은 창 자루 끝에는 약 7kg에 달하는 창날이 달려 있었습니다. 기골이 장대한 그런 골리앗이 온 몸에 갑옷을 두르고 어마어마한 무기를 손에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눈을 부아리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자 그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치를 떨며 도망치거나 숨기 바빴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에도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이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습니다. 그 때 다윗이 그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에 나타났습니다.  그 광경을 본 다윗은 하나님을 모 독하는 그 소리를 듣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이 그 골리앗과 싸우러가겠다고 자청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모습의 골리앗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Ⅰ. 어느 누구도 문제 앞에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골리앗을 앞에 두고 사울 왕은 백성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이제 이스라엘에 사는 그 누구라도 골리앗만 꺾을 수 있다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새롭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귀족으로 살았든지, 아니면 평민으로 살았든지 관계없습니다. 설혹 그 사람이 종이나 노예로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자유로운 신분으로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그들이 골리앗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골리앗과 싸워보기나 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을 향해 고함이나 한번 질러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 한번도 골리앗과 싸워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단지 거인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용기를 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Ⅱ 주어진 힘을 비판하며 용기를 꺾는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는 또 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용기를 팍팍 꺾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큰 형 엘리압은 다윗을 가리켜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하다고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윗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보면 자기는 아예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서 큰 맘 먹고 도전하려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시도하는 사람의 기를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엘리압의 공격이 있을 때, 이기는 유일한 길은 참는 것입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엘리압하고 싸우기를 원합니다. 엘리압하고 싸웠다면 이겨도 문제요, 저도 문제입니다. 만약 다윗이 엘리압을 이겼다면 도덕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형이 잘못했어도 형 때린 동생을 칭찬하는 문화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졌다면 골리앗과의 싸움에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온 힘을 다 쏟아 부어 탈진 상태가 되었을 것이고 그 게임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압이 아닙니다.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싸우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Ⅲ 주어진 힘을 남을 살리는 일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도전할 마음조차 먹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어린 소년 하나가 도전자로 나섰습니다. 바로 양치기 소년 다윗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주저하고 있는데, 그가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에게 말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저 골리앗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사울왕은 두려워서 떨고 잇는데 반해, 어린 소년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다윗은 골리앗과 맞짱 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 왕이 보기에 다윗은 아무래도 챔피언 감이 아니었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챔피온에게 도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에게 골리앗과의 대결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자신이 쓰고 있던 놋투구를 다윗의 머리에 씌워주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다윗에게 줍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가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몇 걸음 걸어보더니 너무나도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갑옷을 벗어버리고 칼마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입도 다니던 옷을 입고, 자신이 양을 칠 때 가지고 다니던 막대기를 가지고,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했던 물매에 돌맹이 다섯 개만 주워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러 갑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힘차게 돌진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물매로 돌을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맞혔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골리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창을 한 번도 휘둘러보지도 못했고,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갑옷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물매돌 앞에 거인 골리앗은 그대로 쓰러지고 맙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이 위기 앞에 어린 다윗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모두가 절망하고 힘들어 하는 그 자리에서 그것도 완전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이유를 아십니까?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 ‘만군의 여호와’ 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군대들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47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싸움에 개입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도 두렵고 떨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떨리는 순간 다윗 마음에 떠오른 기억은 아버지 양을 칠 때 공격해 왔던 사자로부터 어린양과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대적하고 그 백성을 멸시하는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께서 꼭 심판하실 것이라 믿고 싸움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윗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물맷돌 몇 개가 다였습니다. 곰이나 사자를 잡을 때 썼던 그런 물맷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은 승리합니다. 믿음의 눈은 어둠을 꿰뚫고 어둠 너머에 있는 희망을 노래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사울 왕이 입던 튼튼한 갑옷이 있어야 내 삶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살진 않으셨습니까? 내 손에 사울의 칼이 들려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칼을 손에 쥐기 위해서 안달하며 살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화려한 세상의 투구가 내 머리에 씌워졌을 때 만족하지 않았나요? 세상의 권력이라는 갑옷, 안정된 직장이라는 갑옷, 성공이라는 갑옷을 입고선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셨다는 거짓된 믿음에 안주하며 살지는 않으셨나요? 오늘 우리는, 그리고 한국교회는 투구를 벗어야 합니다. 갑옷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손에 쥔 칼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탈종교화 시대에 교회가 살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믿음을 회복하는 길만이 탈기독교화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심지어 변질되어도 믿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때 교회는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두렵지 않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한 인생에게 선포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네가 바라는 금과 은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10)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사울이 입었던 투구와 갑옷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복음입니다. 교회는 이 보혈의 생수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 때 사람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려도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아야 하고,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52돌을 맞는 우리 교회가 할 일은 비록 내게 금과 은이 없을찌라도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투구와 갑옷과 창칼처럼 외형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변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다윗은 어렸지만, 그는 그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혔습니다. 이제 52돌을 맞는 우리 교회가 할 일은 비록 내게 금과 은이 없을찌라도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을 가진 다윗의 손을 붙잡고 골리앗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립니다. 이 물맷돌이 주님의 손에 들려 질 때 세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예수입니다. 나는 우리 동성의 모든 식구가 이 은혜를 힘입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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