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신6:20-25. 2021. 6/20. 주일 설교
이번 달은 우리나라로서는 정말 잊을 수가 없는 이 나라를 위해 엄청난 수고와 값비싼 희생을 치룬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산타아나가 말하기를 “뼈아픈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경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혜로운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와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놓여 있고, 그 요단강만 건너가면 오랫동안 기다리고 소망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들이 광야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마음은 금방이라도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딛고 싶은 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굳게 마음에 다짐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는데, 신명기는 그 율법들을 총정리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이 율법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짐시키기 위해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마치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이 시험 보기 전날 그동안 배웠던 모든 내용을 마지막으로 총정리하는 공부를 하는 것처럼,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총정리한 것이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뜻은
Ⅰ. 과거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20절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살아가야 할 세대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광야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통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말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길게는 40년 이상 광야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모세가 우려했던 세대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살벌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구경한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체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인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가나안 문화에 접하게 됩니다. 가나안 문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광야에서 받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십계명을 외워라. 율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율법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아무리 강조해도, 광야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보지 못한 후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물어올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렇게 항의하며 물어올 텐데, 그 때에 부모들이 그런 후손들에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30세 미만인 사람 중에서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7.4%나 된다고 합니다. 중 고등학생은 56.8%가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 절반 이상이 6.25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6.25가 우리나라와 일본이 싸운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더구나 코로나19사태를 겪으면서 새로운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뉴노멀’이라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은 “시대변화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정상이었던 것들이 비정상이 되었고,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정상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변화 속에 살아 왔지만, 지금 코로나를 겪는 동안 과거와 다른 새로운 기준이 생겨나게 되고, 사람들이 그 새로운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가치들이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잊혀지는 상황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나라는 20세기와 21세기를 겪는 동안 우리나라는 나라자체가 사라질 법한 엄청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하나가 일제로부터 나라를 찬탈당하여 36년동안 우리 민족이 받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해방을 맞아 잃어버린 주권을 찾고 다시한번 도약하는 길목에서 6.25라는 민족 상쟁의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 7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6.25 동란으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 예배드리는 우리 가운데 그 전쟁의 고통을 몸소 겪은 분도 계시지만, 대다수는 그 아픔과 상처를 보지 못한 전후 세대가 많습니다. 세월은 이렇게 흘러갔지만, 전쟁의 상처가 정말 깊이 패인 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아픔을 겪는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우리는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953년 휴전으로 포성이 멎었지만, 10여년이 지난 1960년대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유엔에 등록된 120여 국가 중에 필리핀의 국민 소득이 170달러 태국 220달러일 때 한국은 76달러였습니다.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나라는 인도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후진 국가였던 것입니다. 6.25라는 동족 상쟁의 비극 속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이 땅을 지킨 분들이 부모세대입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을 위해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 목숨을 담보로 월남에서 싸운 용사들과 뜨거운 중동지역에서 수고한 산업 역군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과거의 고통을 즐거이 참고 견디어온 앞선 세대들,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삶의 전 영역에서 풍요를 누리고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과거가 없었다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우리에겐 현재도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세대가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광야세대와 광야를 경험하지 못한 가나안 두 세대가 중복되는 50여 년 동안은 두 세대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단했습니다. 요즘도 세대간에 갈등이 일고 있는 꼰대 세대와 MZ 세대는 너무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또 하나의 사회 문제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신세대야말로 정말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보기에 기성세대야 말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보이지 않는 갈등과 대립을 계속 이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앞으로 저 가나안을 이끌어갈 다음세대의 자녀들에게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를 되돌아보며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세대들이 과거를 망각하고 세상의 거대한 문화 속에 빠져 신앙의 정체성을 잃는 일이 없도록 그들이 ‘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이로고 질문 할 때,
Ⅱ.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21절
“우리가 옛적에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애급에서 바로의 압정에서 430년 간 종살이 했었다는 것입니다. 노예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전에 노예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말입니까? 부끄러운 과거입니까? 그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그걸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자식들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그렇게 물어오거든 가장 먼저 ‘조상들이 옛적에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했던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노예생활했던 노예란다’ 하는 말보다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선택된 민족이다’ 그런 것들을 말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런 건 전혀 쓸데없는 자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노예 출신이란다’ 그렇게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언약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할 그 어떤 것도 자기들에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종살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에 종살이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 말입니다. 그리고 23절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무슨 말입니까? 지금 너희가 누리는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이 너희를 눈동자 같이 지켜 주셨고 너희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임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거기서’ 노예로 비참하게 살았는 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외친 ‘이것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이란 말은
Ⅲ. 이제 우리가 살아야 할 몫 -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24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살아야 할 그 땅은 죄악이 관영한 땅이다. 그러나 거기에 휩쌓이지 말고 광야에서 함께하시고 너희들을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다음세대에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병든 문화와 세속에 쪄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전도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명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동성의 식구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면 세상 앞에 복음의 빚진 자로 그 빚을 갚는 일에 교회가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롬 1:14에서 자기 스스로도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빚을 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바울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한순간에 인생이 뒤집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순간에 그는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복음의 빚 앞에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것은 바울에게 엄청나게 크고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자기 삶의 길이 바뀌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도 남습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만약 무기수가 감형을 받아서 출옥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이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바울도 이 은혜 앞에 섰을 때, 그가 비로소 빚지고 사는 인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받아 드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려야 했는지요? 이제 우리도 이 복음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신촌에 있는 양화진에 가면 비석이 많이 서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순교한 사람들,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해서 일찍 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 이 땅에 와 제대로 사역의 꽃 한번 피우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의 무덤입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피한방울 섞이진 않은 이 땅에 복음을 위해 살다가 고국에 돌아가지도 못한채 쓸쓸히 이 양화진에 묻힌 것입니다. 그 중에 헐버트 선교사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하노라.” 저들의 섬김과 희생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그들의 순교의 피위에 세워져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성 교회는 지금부터 10년 전만 해도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목사로 꾸준히 복음의 빚진 자로 헌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헌신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명도 다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70여 군데 선교지와 북한 선교, 미자립 교회 그리고 언론기관 특수 사역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정말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낯설은 이 땅에 유엔군으로 와서 이 강토에 피를 흘린 젊은이들이 무려 16개국 청년가운데 154,880명이나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랑의 빚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세계를 향해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하는 일입니다. 선교는 내가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5대양 6대주에 예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요,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이제 여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선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 할 때 왜 내가 빚진 자인가를 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가나안 목전에서 이 말씀으로 부탁합니다. ‘왜 다음세대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살아야하냐를 묻거든 분명하게 답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분단된 이 민족이 남북이 하나되는 그 통일한국을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기도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서 주의 영광을 온 땅에 펼쳐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