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인생이 되라 - 맥추 감사절 신16:9-12. 2021. 7/4.
오늘은 우리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맥추감사절을 맞아 감사에 대해서 깊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사를 잘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감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건강하고 성숙합니다.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육적인 면에서도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감사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로, 몇해 전에 한 해 동안 서울소방방재본부에 소속된 119구급대가 292,000번 이상 출동해서 212,000명 이상을 병원으로 옮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119구급대의 헌신적인 봉사로 생명을 건지기도 하고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한 사람은 100중 3명 꼴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하나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가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깊이 알려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면서 배우고 연습해 보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나에게도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며 나아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워서 습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감사가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이 바라다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200만이 넘는 백성들에게 고별 설교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이 살아야 할 가나안 땅은 이방문화가 자리잡은 곳이고 거기 사람들은 우상과 세속에 빠져있습니다. 만약 준비 없이 들어갔다간 민족 자체가 이방 문화에 빠질 것 같은 염려 속에 이들에게 당부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절기 3가지를 지킬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을 보면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3개의 명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1년에 3번 추수를 합니다. 겨울 동안 자란 밀을 초봄에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이 추수기에 맞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입니다. 곧 유월절 명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봄부터 시작해서 뿌린 밀과 보리가 자라서 추수를 하는 늦여름이 되면 칠칠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맥추절로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신 양식을 놓고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늦은 가을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가꾼 올리브나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하는 연말이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도 우리는 농사도 안짓고 구태여 이 절기를 왜지키는가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를 보면 이 맥추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면 우리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맥추절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후 7주 만에 지키는 절기라 하여 칠칠절이라고 하고, 오십 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라 하여 초실 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언제 우리에게 임하셨는지 아십니까? 행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행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행2:1-2,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의 앉은 온짖에 가득하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120명이 500명이 되고 500명이 3천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자기 물질을 드리고 자기 몸을 드리고 자기 삶을 드렸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달라진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첫 열매로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야고보도 자신을 바치고, 바나바도, 스테반도 빌립도 자기 자신을 바쳤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철저하게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기꺼이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러면 이 맥추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Ⅰ. 맥추절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2절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맥추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첫 열매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또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다가 한참 진행이 된 후에 알게 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려면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 ‘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애급에서 바로의 압정에서 430년 간 종살이 했었다는 것입니다. 노예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전에 노예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말입니까? 부끄러운 과거입니까? 그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조상들이 옛적에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했던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노예생활했던 노예란다’ 하는 말보다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선택된 민족이다’ 그런 것들을 말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런 건 전혀 쓸데없는 자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노예 출신이란다’ 그렇게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종살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에 종살이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얼마나 귀한 은혜인가 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내가 믿을 때, 그 구원의 감격이 나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위 구원의 첫사랑입니다. ‘아직도 첫사랑을 간직하고 있느냐? 첫사랑의 감격이 아직도 네 가슴에 뜨겁게 남아 있느냐?’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보면 모든 것이 기계적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귀를 꽉 막아 버리고 자기 최고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결국은 패망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국은 넘어집니다.
묻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찡-하게 다가오는 감격이 없습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려본지도 너무나 오래되어버렸습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해본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예배시간에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기는 합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헌금은 다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도 있기에 이단을 분별해 내는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삶만 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뜨거운 감격이 있습니다. 생동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는 우리의 신앙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오랜 신앙생활 경험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감격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우리의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Ⅱ. 예물을 들고 나와 감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6,17절에도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여기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본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제물이라고 불렀는데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 곧 희생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헌금의 성격은 어느 정도 희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그것은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성의 없는 헌금행위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마치 싸구려 은혜인 것처럼 은혜를 격하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이란 희생만 하다가 마는 것이냐고 물을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은 일종의 씨 뿌림과 같은 것입니다. 씨 뿌림은 땀흘림이요 희생이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밀을 안다면 희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후9장에서는 이것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고후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은 결코 자학적인 희생이 아닌 기쁨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래드패츠라는 신학자요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떤 교인이 와서 그에게 "목사님, 우리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그때 그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눈만 뜨면 우리 부부를 보기만 하면 그는 줄곧 무엇인가를 달라고 졸라댔지요.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지난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자매님, 살아있는 교회는 헌신을 요구합니다. 죽은 교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택은 자매님의 몫이지요." 래드패츠는 WEC의 설립자인 C.T.Studd의 말을 인용하면서 헌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헌신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Ⅲ. 즐거움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11절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돈 앞에서 즐거워하고, 세상 앞에서 즐거워하고, 여러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 때마다 즐거움을 얻어야 합니다. 천국에 갈 때 어떻게 가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 갈 때 즐겁게 가셔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허무해지고 유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완고해지고 기독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행복해진다." 그래서 유교는 날마다 제사집 같고 불교는 날마다 초상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과 같다고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올 때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뭐하러 오셨습니까? 잔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잔치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즐겁게 믿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워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즐거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최초에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글자 그대로 즐거운 동산입니다.
그런데 이 맥추절의 축제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까? 여기 ‘함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첫 번째 대상이 '너와 네 자녀'입니다. 두 번째로 '성중에 있는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이 맥추절에 어느 누구 예외 없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그 속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의 향기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교회 식당에서 점심을 할 수가 없는데, 특히 연로하신 분들이 교회에 한번 오려면 얼마나 힘이든지 모릅니다. 얼마 전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에게 꼭 식사 대접을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연세드신 분들은 교회 평생을 헌신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젠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주변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밥한끼를 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랑이고 이런 교회가 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가난이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한번 잠시 멈추어 중간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쫒기는 사람처럼 늘 불안하고 만족이 없고,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가여운 인생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 삶의 감사가 마르지 않는 생수처럼 늘 흘러넘치는 인생이십니까?
이제 후반기 우리도 하프타임을 가지고 자신의 신앙 점검을 하십시오. 구원의 기쁨이 있는지, 또 늘 감사와 즐거움이 나의 만족이 아닌 이웃에게 증거 되는지, 무엇보다 누림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향기가 나에게 나는 지 자신을 깊이 살펴 보시고 메마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젖는 감사가 풍성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