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약1:2-4. 2021. 7/18. ②
우리가 살아갈 때, 항상 문제를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그 문제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에 대해 퍼시픽신학대학에서 상담학 교수로 있는 데이비드 스툽 박사는 문제를 만날 때 “무엇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는 태도의 차이다.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500대 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4%가 자신의 성공 요인 중 태도를 다른 어떤 것보다 첫 번째로 꼽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태도의 중요성은 특히 인생의 시련을 당했을 때에 더욱 절실해집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말로 표현을 담기 힘든 고난을 겪고 살아야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의 말씀은 시련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2절 이하의 말씀에는, 흩어져 사는 12지파가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에 직면한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권면하는 성령님의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시험을 극복하는 태도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2절에 ‘여기라’, 3절에 ‘앎이라’, 그리고 4절에 ‘앎이라’고 기록된 3가지 단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온갖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과 삶의 풍요함과,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신앙인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Ⅰ. ‘여기라’입니다.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 ‘여기다’라는 단어에는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경제 용어로 ‘평가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시련이 올 때 시련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는데, 시련을 기쁘게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서신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난 뒤 자신의 인생을 재평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빌3:7-8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도바울은 세상의 명예와 돈, 권력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작정하고 평가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재평가입니다. 재평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재평가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날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재평가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련이 올 때 그 시련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다’는 단어는 ‘헤게오마이’라는 헬라어인데 우리가 잘 아는 단어 ‘헤게모니’가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도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평가할 뿐 아니라 주도합니다. 그것은 바로 시련이 올 때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 곧 모든 시험과 시련을 당하게 되면 어느 누구 예외없이 근심과 걱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것도 시험이 다가오는데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자 그대로 다양한 시험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어 닥치는 시험은 분명 우리를 두렵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시험과 시련을 부정적인 태도로 당하지 말고 긍정적인 태도로 주도권을 가지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일도 많고 설명이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학생의 경우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안 오르고 직장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진급은 고사하고 해고 통보를 받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업을 할려고 시장 조사를 수차례하고 전문 컨설팅을 받아보고 오랜 기간 준비하고 시작한 사업인데 갑자기 코로나 19라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한 순간에 투자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었다면 그 일을 당해 보지 않은 분들은 그 심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고, 그런 일을 당하면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됩니다.
세상에는 정직하게 살았는데, 고난을 겪는 일도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으로 살아왔고, 기도하며 일을 시작한 것이 오히려 허무하게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악하게 살았는지 만민이 압니다. 그런데도 돈을 잘 벌고, 건강하고 오래 삽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일이 이해가 되십니까? 의롭게 살았는데 죽을병에 걸린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까요? 악한 자가 부자로 살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죽을 때도 고통 없이 죽는 것을 본다면 그래도 시험에 들지 않을까요?
어린이 동화집 ‘로빈슨 크루소’라는 책에 보면 로빈슨과 프라이드라는 이름의 어린이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프라이드가 “하나님은 굉장히 전능하시고 능력이 많다고 하셨죠?”라고 질문하자, 로빈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암, 그렇고 말고.” 프라이드는 계속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능력이 많고 힘이 많은 하나님께서 마귀를 없애 버리고, 고통과 죄를 없애 버리지 않으셨을까?” 로빈슨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 참 지혜로운 말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내가 하나 묻겠는데, 왜 하나님은, 날마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인간을 전부 없애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실까?”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고통 과 고난과 문제들을 남겨놓으신 그 이유를 철부지 아이들 같은 우리들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처음 고난당할 때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보면 고난 속에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창50:19-21절까지 보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다시 형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은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이 당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 유대 청년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난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미디안 장사꾼들의 손에 넘겨졌고, 애굽으로 들어가서는 바로 왕의 경호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고, 나중에는 고위 관료들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고난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야고보가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재 평가를 통해 문제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지 말고 기쁨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을 온전히 기뻐해야 할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Ⅱ. 앎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백성, 구원받은 자녀에게 시련을 주실까요? 오늘 본문은 인내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믿음의 시련은 반드시 인내라는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나 터널에 들어가면 앞이 안보이고 두려움이 옵니다. 왜 많은 신앙인들이 고난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바로의 마음이 바뀌어 막강한 무장한 군대를 보내 추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앞은 검푸른 홍해바다가 버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변하여 모세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간 듯한데, 뒤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에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이 믿음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듯 하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했습니다. 늘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성장과 변화가 없습니다. 성도들과 상담해보면, 과거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낍니다. 과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실수와 실패, 아픈 경험들을 묵상하고 곱씹게 합니다. 과거의 환영(幻影)에 시달리게 합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들, 아픈 경험들이 우리에게 족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생각보다 아프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소위 트라우마라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울증에 빠져서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예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배교하거나 무신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야고보는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인내를 이야기합니다. 인내가 무엇입니까? 견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굳게 붙잡고 아무리 힘든 상황이나 압박이 가해진다 하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그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히10:36절에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먼저는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다고 말씀합니다. 인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인내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유혹이 있고, 때로는 수없이 많은 세상의 압박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다시금 멸망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놓으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온갖 고난을 당하시며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인데, 어떻게 다시금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 하더라도, 또 세상이 그 어떤 힘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위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인내의 과정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전10:13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결코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라면 반드시 피해갈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우리는 힘든 과정일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선언하실 그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Ⅲ. 이루라 는 말씀을 합니다.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이루라’는 말은 성숙이라는 단어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성품의 변화에 있습니다. 주님을 닮아갈 때 내 인생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에 늘 풍성함이 가득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늘 건강한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내 삶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도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은 늘 내 곁에 계심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결핍이 없는 부족함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우리의 성숙한 모습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텅빈 예배당에서 주일에 이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녹화를 하면서 한켠 마음이 울컥하는 것이 생깁니다. 이제 좀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모든 교회의 할 일들이 회복이 일어나길 기대 했는데 또 이렇게 텅빈 예배당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설교하는 제 모습 속에 감정 조절도 안되고 고통이 와 닿았습니다. 어찌 저만 이겠습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기침체로 인해 너무나도 힘든 때를 견디고 있고,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너무나도 힘들게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음을 만나는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서 요16:33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주께서 말씀하신 평안은 환란을 면제해주고, 도전이 없는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환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평안, 절대적인 평안인 것입니다. 이런 평안을 약속하시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은 환란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환란 속에서의 승리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고난너머 펼쳐질 그 영광의 주를 바라보고 지금의 이 문제, 인정하시고 미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이 시련을 당당히 맞서며 나아가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