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의 때와 축복의 때를 대비하십니까? 약1:12-18. 2021. 8/1 ④
성경을 한두 번 읽어 보신 분이라면 '삼손'에 대해 익히 아실 것입니다. 삼손은 극적으로 등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여 년 동안 블레셋의 속국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세워 블레셋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영웅처럼 등장한 그가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최후를 마침으로, 드라마틱한 생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 유명한 교부 암부르스가 한 말인데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입니다. "삼손은 사자의 목을 조여 죽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한 사람이었고, 삼손은 원수의 쇠사슬을 쉽게 끊을 수 있었으나 자기의 정욕의 쇠사슬을 끊지 못한 사람이었다. 삼손은 원수의 보리 밭에 불을 지를 수 있었으나 자기는 한 여인이 지른 정욕의 불에 타 죽어 버린 사람이다." 그도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방심 하자마자 유혹 앞에 무너지는 비참한 일을 겼지 않습니까? 삼손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고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문제를 잘 대비하면 우리 삶의 갈림길에서 신앙의 진정한 승리의 기쁨이 있지만, 이 문제를 바로 대비하지 않고 실패를 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피폐해지고 비참한 자리에 빠진다는 것을 말씀을 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내 인생을 좌우합니까? 그것은 바로 유혹과 시련입니다.
Ⅰ. 유혹에 대한 올바른 이해 13-16절
야고보는 유혹을 이기려면 ‘유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3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유혹(誘惑, Temptation)입니다. 성경은 유혹을 주로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험이나 유혹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간교한 수단을 일컬어 '시험' 또는 '유혹'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이 경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과연 유혹의 늪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중 마귀의 유혹을 면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번도 유혹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죄를 짓지 않고 자기를 지켜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혹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유혹이 찾아올 때’라는 말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유혹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세요? 우리에게는 악과 싸워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무장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악과 싸워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생각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은 다윗도 유혹의 덫에 걸려 얼마나 많은 세월 눈물로 회개하며 살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이 유혹은 도대체 어디에서 옵니까? 오늘 본문은 유혹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근원을 알고 대비해야 유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13절에 유혹의 근원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워진 이유가 바로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들은 좀 더 안정되고 좀 더 넉넉하고 좀 더 즐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좀 더 부하려다가 그만 모든 것을 잃고 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왜 시험에 들게 만드시나요?’며 거칠게 항의를 합니다. 어리석은 것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요. 늘 남을 탓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탓해요. 그 역사가 매우 깁니다. 아담 때부터 그랬어요. 창3:11-12절 보세요.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참, 기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와를 주셨을 때 아담이 뭐라고 말했었나요? 창2:23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런데 자기가 미끼를 물어 놓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그것은 아담의 후손이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냐?’는 것이죠. 아담이나 우리나 자신의 비뚤어진 욕심, 그 욕심으로 인해 유혹에 빠졌으면서 하나님께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고보는 우리가 짓는 죄의 원인이 하나님이실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유혹의 근원에 대해 14절에 밝힙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 ‘미혹’이라는 말은 낚시에 쓰는 용어입니다. 고기를 잡기 위해 미끼를 만듭니다. 물고기가 왜 유혹을 당합니까? 물고기가 좋아 하는 미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 바늘로 유혹 할 수 있는 물고기는 없습니다. 낚시를 하려면 물고기가 좋아하는 낚시 밥이 있어야 합니다. 미끼가 있어야 합니다.
크레이그 그로쉘이 지은 책 중에 “일상의 거룩함을 회복하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에스키모인들이 가축을 공격하는 늑대를 잡는 비법이 소개되어 있어요. 어떻게 잡는지 아세요? 늑대를 잡기 위해 일단 작은 짐승 하나를 잡아 그 피를 날카로운 양날의 칼에 담아 얼립니다. 그 과정을 반복해요. 그러면 짐승의 피가 섞인 그 얼음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변합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스크림처럼 변한 칼을 늑대가 다니는 길에 날이 위로 향하도록 세워둡니다. 칼날은 보이지 않지요. 그러면 배고픈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다가와 얼음을 핥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얼음 속의 칼날이 드러나요. 하지만 이미 혀의 감각을 잃은 늑대는 드러난 칼날에 의해 자신의 혀가 베이고 피가 흐르는 데도 계속 핥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혀에서 흐르는 따뜻한 피로 인해 늑대는 피에 대한 더 큰 갈증을 느끼며 칼날을 정신없이 핥다가 그렇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묻습니다. 사람이 왜 유혹에 빠집니까? 미끼가 원인인 것 같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속에 있는 욕심입니다. 아무리 미끼가 그럴듯해도 그 미끼를 무는 책임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왜 미끼를 물죠? 이유는 단하나, 그 미끼를 물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세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미끼 때문에/ 죄에 빠지게 되고, 유혹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미끼가 나타나면 우리 안에 욕망이 반응합니다. 미끼와 우리 내면에 욕망이 결합하면 무엇을 낳습니까?
다시 14-15절에 보시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 순서의 과정이 나옵니다. 먼저 잉태입니다. 이 말은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유혹의 두 필수요소, 즉 미끼와 내면의 욕망이 결합할 때 유혹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미끼와 욕망이 결합하면 유혹이 생겨나고 결국 죄를 번하게 됩니다. 16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유혹에 속으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이 유혹을 이기려고 대비하려면
Ⅱ. 참고 견디십시오.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여기 나오는 ‘시험’은 13절의 시험과 다릅니다. 12절의 시험은 약1:2절의 나오는 test입니다. 시련, 또는 연단을 말합니다. 이 연단은 나를 더욱 성숙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이 시험이 오면 참아야 합니다. 견디십시오. 견딤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참으로 힘든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것에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때가 어쩌면 우리가 더욱 신 앙의 훈련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족하는 훈련입니다. 때로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때로는 너무 힘들더라도, 때로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참고 기다려야 할지라도, 우리는 참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많이 누렸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분명 그것은 쉽지 않은 훈련입니다. 그 훈련을 잘 이겨내고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가 더욱 믿음 안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시험을 참고 견뎌야 합니까? 12절에서 ‘시련을 견디어낸 자’라는 뜻은 ‘시련에서 인정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승리할 때까지 시험을 잘 통과한 자라는 뜻입니다. 승리할 때까지 시험을 잘 통과하려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이성적 유혹이 올 때,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 현장에서 도망해야 합니다. 거절해야 합니다. 불이익이 와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시대 앞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를 악물고 시험을 견뎌야 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죄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가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할 대적입니다. 본문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내 인생의 승리의 기쁨을 주십니다.
Ⅲ. 시험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17-18절
우리는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시험이 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 야고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합니다. 17-18절에 보세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예수를 믿는 그것으로 고난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문제를 만날 때, 그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당할 때, 얼마나 많은 갈등과 힘듬이 있겠습니까? 그때 야고보는 묻습니다. 지금 이 고난 한복판에 있는 너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정체성을 묻고 있습니다. 18절에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세상을 살며 환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했지만 결국 갈라서야 하는 아픔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정말 우리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을 가랑잎처럼 흔들어 놓는 인생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한 분의 인격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분 앞에 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쏟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변함이 없으신 그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가운데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이 은혜 앞에 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늘의 삶을 잘 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유혹, 반드시 이겨야 한다. 왜입니까? 나 하나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희생을 치루신 십자가의 예수를 안다면 다시는 무너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모두가 힘들어 할 때 잘 대비하십시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닐 때 영적으로 깨어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대를 볼 줄 아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 문제없습니까? 혹시 영적으로 방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이 졸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앙이 미지근해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매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 맛에, 세상 재미에 마음이 자꾸 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점점 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점점 멀리 놓고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의 교제도 점점 뜸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뭔가 지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을 일컬어 방심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방심해지면 대신 육신의 정욕이 힘을 얻게 됩니다. 거룩의 힘이 약해지면 탐심의 힘이 생깁니다. 무슨 유혹이든지 탐욕, 욕망의 단계로 접어들면 헤어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가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가까이 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마음에 어떤 이상한 것이 고개를 들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무더운 여름, 우리 모두 잠25:13절의 말씀처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자! 묻습니다. 여러분은 시험의 때와 축복의 때를 대비하십니까? 기도 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