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해가고 있습니까? 약1:19-27. 2021. 8/8. ⑤
요즘 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가운데 일본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의 최고의 기량을 다루는 경기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올림픽은 아마추어 정신을 가지고 선수들이 조국의 명예를 위해 뛰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여지 배구에 김연경이란 선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배구계에서는 아마 100년에 한사람정도 나올까말까하는 선수라고 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입니다. 이분은 선수로서 기량만 뛰어날 뿐 아니라 인격면에서도 대한한 성숙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터키 리그에서 한국에 왔을 때 일화입니다.
터키 리그에서 뛰던 김연경 선수가 국내 리그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연경 선수가 우리나라에 복귀하면서 그녀가 보인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터키 리그에서 뛴 김연경 선수는 세계 여자배구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였습니다. 정확하게 알려져 있진 않지만 20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복귀하면서 그녀가 받는 연봉은 3억 5천만 원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 받겠다고 해서 그만큼만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구단이 선수들에게 지불할 수 있는 연봉의 총액에 한계가 있습니다. 한 팀당 23억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23억으로 15명 내외의 선수들에게 연봉을 줘야 합니다. 뛰어난 한 선수에게 많은 연봉을 주면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갈 금액은 아주 작아집니다.
그럼에도 김연경 선수가 우리나라 팀으로 돌아온다고 할 때 약 7억 정도는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억을 받고 국내로 복귀하는 것만도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연경 선수는 그 절반인 3억 5천만 원만 받겠다고 하면서, 나머지로 다른 선수들이 손해 보지 않게 해 달라고 구단에 요청했다고 합니다. 프로 선수들은 연봉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는데, 김연경 선수는 세계 최고의 선수임에도 스스로 다른 선수들보다 적은 연봉을 받겠다고 함으로써 다른 선수들을 배려했습니다. 실력보다 더 뛰어난 그의 인품이 잘 드러난 이야기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실력이상의 정말 아름다운 성숙의 모습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 가운데 하나는 나 자신 안에 매몰되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거나 배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들이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이유는 바로 성숙함입니다. 우리는 성숙을 위해 태어났고 우리의 성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평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쓰여진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온전한 사람(약3:2)의 표현을 좀 더 정확하게 옮기면 ‘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성숙의 3가지 증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잘되고 있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잘 성숙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중 하나가
Ⅰ. 분노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19-20절
“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지금 야고보는 영적 성숙을 말하면서 분노의 문제를 먼저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쉽게 대답을 드리면 분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분노! 우리의 삶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의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삶이 위축되고 불확실성이 강한 시대에는 더욱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내면에서 강하게 일어납니다. 더구나 요즘, 언제 그칠지 모르는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삶이 제한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기록적인 지루한 폭염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서 그 분노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폭발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묻지마 폭행이 그런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총기난동 사건이 그런 분노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분노는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정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뭔가를 하고 싶은 데 하지 못하게 방해를 받거나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당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화가 분노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잠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잠19:11절에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분노,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4: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우리 마음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거든 그 분노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빨리 풀어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솟아날 때마다 본문 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약3:6절에 ‘말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야고보서 3:6)고 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을 그렇게 망치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말 한 마디로 누군가의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좌절하고 낙심되고 죄에 빠진 사람을 건져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는 한 사람의 생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고, 인격을 구해내는 것이고, 그의 영혼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Ⅱ.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야 합니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러분, 온유하게 말씀을 받는 것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하는지 아십니까? 설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설교 말씀에 귀 기울여 잘 듣는 사람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은 내 스스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단이 가장 많이 쓰는 고도의 전략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사용하지만, 말씀을 듣지 모하도록 우리의 귀를 막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단이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어떻게 우리의 귀를 막는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신앙적으로 무시하게 만듭니다. 설교자의 약점을 부각시켜서 설교자에게 실망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서 설교자와의 관계를 나쁘게 만듭니다. 설교자와 인격적으로 관계가 나빠지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더라도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좋은 말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셨는데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인간적인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긴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갈6:6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함께 하라”는 말씀은 성경언어로 말하면 ‘코이노니아’라는 말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 ‘교제, 사귐, 나눔’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 - 생명까지도 -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르침 받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Ⅲ. 언행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말씀은 야고보서의 중심 구절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함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바로 우리의 삶속에 그 말씀이 삶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취약성을 꼬집는 말 가운데 “신앙은 있으나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생활과 교회 밖의 생활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삶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외치지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법으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피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곳입니다. 교회는 암울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행함의 믿음을 말하면서 삶의 두 가지 모습을 대조합니다. 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②. 말씀을 듣기만하는 자를 보여 줍니다. 야고보가 왜 삶의 두 가지 모습을 대조할까요? 그 이유는 교회 안에 말씀을 듣기만하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듣는 것은 위대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문 22절은 행함의 의도가 없이 말씀을 듣기만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3-24절에 그러한 모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마치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무 조처도 하지 않는 행위와 같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내 인생의 축복이 되려면 말씀을 삶으로 옮겨와야 합니다.
여러분, 파파뉴기니아에 선교사로 가있는 황중기 선교사님이 얼마 전에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자신이 담당하는 부족에 글이 없었는데 이들에게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을 해주는 작업을 해 왔는데 신약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가 이행 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번역이라고 합니다. 성경학자 토레이 박사는 가장 위대한 번역은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각자의 삶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1:3절에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가들에게 복이 있나니” 성경의 여러분의 삶에 축복이 되려면 지키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순종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5만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 조지 뮬러의 기도의 비밀은 그의 기도가 늘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수 밖에 없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위대한 응답의 기적을 경험한 더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철저하게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구약의 시편을 읽다가 시68:5절에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팬장이시라”는 말씀을 듣고 영국 브리스톨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야고보에서 같은 맥락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참된 말씀의 사람이 되려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 앞에 선자들이 가지는 성숙한 삶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숙한 성도의 모습은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경건이 나오는데 이 경건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아보라’는 말은 “찾아보다”, “돌보다”, “관심을 기울이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한 삶은 바로 성숙한 성도의 자세인데 그 구체적인 것은 소외당한 사람들을 돌아볼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자신이 이 오염된 세상 앞에 빠지지 않고 외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나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일본 올림픽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승리한 자에게 메달을 수여합니다. 1등은 금, 2등은 은, 그리고 3등은 동메달을 줍니다. 그런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메달을 주십니다. 물론 에피소드지만, 한번쯤은 깊이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천국유머를 들어보셨습니까? 사랑을 나누며 산 사람들-금 메달/사랑을 받으며 산 사람들-은메달/사랑을 기다리며 산 사람들-동 메달/사랑을 잊어버린 사람들-목 메달/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 곳에 사단은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미소를, 관심을, 격려를, 부담이 없는 선물을 나누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고단한 시절 말 한마디, 그리고 배려와 격려 속에 그리고 나눔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갈 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모두가 힘들어 하는 이때에 성숙이라는 숙성된 삶의 향기를 이웃과 성도들에게 펼쳐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온유함으로 은혜 받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