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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산 믿음, 죽은 믿음 (약2:14-26) 2021. 8/2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8-29 | 조회: 421

산 믿음죽은 믿음 2:14-26. 2021. 8/29. 

 

여러분 가운데 계란 중에 이것을 아십니까겉모양이 달걀이라고 해서 모든 달걀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유정란 달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 달걀이 있습니다. 유정란은 어미 암탉이 21일간 품고 있으면 반드시 새로운 생명인 병아리가 나오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오랫동안 어미 닭이 품고 있어도 생명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유정란은 생명 인자를 소유한 살아있는 달걀이요무정란은 생명 인자가 없는 죽은 달걀입니다이것은 생명과 죽음의 영원한 차이입니다생명이 있느냐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인데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덮치고손해가 나고풍랑이 일어나면그냥 도망가거나무너지거나썩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풍랑이 셀수록더욱 더 주님 품에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그것이 산 믿음의 모습입니다그러므로 바울은 고후1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러분여러분의 믿음은 건강합니까여러분은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습니까?

 

이 땅에 처음 기독교 신앙이 소개 되었을 때 이 신앙은 이 땅에 희망이었고 등불이었습니다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신앙인과 교회를 존경했습니다교회를 통해 이 땅에 민초들은 민주적인 회의와 정치를 처음 배워 민주정치를 실험하게 되었습니다신앙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억압에서의 해방을 꿈꿀 수가 있었습니다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중에 절반인 16명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고 전국 교회들은 만세 운동의 거점들이었습니다당시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2-3%에 불과했지만교회는 민족의 미래였습니다교회를 통해서 서구의 발전된 교육과 의료음악과 체육문화가 소개 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해방된 나라의 리더십이 제공 되었습니다초기 제헌 국회는 기도로 시작 되었습니다. 6.25전쟁시에도 교회는 민족의 유일한 피난처요 위로였습니다전쟁이 끝난 후교회는 민족 재건의 보루였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은 농촌 운동을 일으키던 김용기 장로님이 운영하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고 거기서 얻은 감동으로 새마을 운동의 횃불을 올리게 됩니다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함께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게 됩니다그러나 오늘의 기독교 인구가 20%에 도달한 오늘의 현실 속에 이상하게도 교회는 이 땅에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대신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서글픈 상황을 보게 됩니다왜 이렇게 되었을까요거기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교회 내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아졌지만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든 까닭을 지적하고 싶습니다소위 명목상의 교인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3:1절에 보면 사데 교회 교인들을 향해 살아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이런 죽어 있는 교인들을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산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합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당시 교회 안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가져야 할 살아있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그러면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신행일치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행함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본문 14-16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더웁게 하라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여기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은 없고 말로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낯선 사람이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형제나 자매"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양식을 빌리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가난한 교인이 부유한 교인을 찾아와서 '당장 먹을 양식이 없으니 먹을 것 좀 달라'고 할 때부유하고 여유 있는 교인이 가난한 사람의 그런 사정을 동정하지 못하고아무 것도 주지 않고서 말로만 "가서 밥해서 맛있게 드세요날씨가 쌀쌀한데 감기 들지 않도록 방 따뜻하게 하세요그렇게 말하는 게 무슨 사랑이고그게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성경은 "서로 떡을 떼며 교제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교제했다는 말의 성경언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필요를 따라서 나눠 갖도록 교회에 같다 바쳤습니다그리고 교회를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습니다초대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 형제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나눠졌다는 것에서 참 면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아무리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말은 하면서도 형제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형제의 고통을 나물라라 한다면 그건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우리의 선행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선행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시작하지만그 신앙은 반드시 내 이웃과 형제를 바라게 만듭니다만일 하나님만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닙니다사도 요한은 3:17-18절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늘 야고보서 2장은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함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입니다말하자면 믿는 자의 행함이 어떠해야 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만 바른 행함이다”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이 있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행함을 볼 때 그의 행함이 믿음과 일치하는 행함인가 아닌가?” 말하고 있고 22절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그리고



 


참 된 믿음은 아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실천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19

야고보는 바른 교리를 알고 믿으면서도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귀신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여기 18-19절을 보겠습니다.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말입니까귀신들도 미음이 있다는 것입니다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회당에서 사역하실 때 한 귀신들린 사람이 외칩니다1:24절입니다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뭐라고 고백하고 있어요예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라는 것입니다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5:6-7절에 거라사 지방에 군대 귀신들린 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서자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그런 의미에서 귀신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요즘 말로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아니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합니까? 어떤 차이가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귀신들이 갖는 믿음과 다른 것입니까해답은 간단합니다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 믿음이 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귀신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거짓을 일삼습니다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으면서도 성도들을 유혹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을 일삼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간다면그건 귀신들이 갖는 믿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귀신들이 갖는 믿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허탄한 사람아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의 수준에 머무는 것은 헛것에 불과한 믿음입니다"헛것"이라는 말은 곡식이 열매를 맺히지 못하고 껍데기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벼가 누렇게 익어서 추수를 하고 보니까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껍데기만 있습니다그게 바로 헛것입니다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입니다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그러나 그런 교리를 안다고 해서 훌륭한 믿음이라고 말하거나그런 지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되고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임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믿음은 일단 시작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믿음이 살아있는 참 된 믿음으로 자라가려면 그 믿음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통과하며 성숙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묻겠습니다혹시 과거 학창시절시험을 치르게 될 때면 시험을 기다리며 즐거워한 분계시나요아마 없을 것입니다그러면 그런 고통스러운 시험은 우리의 교육 제도에서 영원히 없애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 계시나요그럴 수 없다구요그러면 여러분은 두가지를 저에게 동의하신 것입니다하나는 시험은 아무도 즐거워 할 수 없다는 것그러나 다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동의 하신 것입니다. 시험이 왜 필요합니까시험을 통해 나의 나된 정체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시험을 그의 자녀들에게도 허용하십니다오늘 그 샘플로 야고보는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첫째는 당시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는아브라함이고 둘째는 믿음의 반열에 오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기생 라합입니다야고보는 먼저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21절을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가 창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을 해석한 말씀입니다특히 아브라함은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넘어서기 힘든 장벽을 뛰어넘고 있습니다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내어놓았습니다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아들 이삭을 내어놓은 것입니다그렇습니다참된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 엄청난 희생을 하겠습니까왜 우리가 드리지 못합니까우리가 신앙하는 사람의 길로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그런 행동을 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둘째는라합의 예를 듭니다. 25절을 보면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이야기는 수 2장에 나오는 여리고성을 한 밤에 정탐하러 왔던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던 이야기를 다룹니다여기서 기생인 라합은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할 때 이 여인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여리고의 왕이 정탐꾼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라합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이 때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이 행동으로 정탐꾼이 탈 없이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나 감정적인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여기서 주목할 것인 라합의 행동은 돌아섬입니다라합은 하나님을 믿은 뒤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기 나라로부터 돌아섰습니다어찌보면 이것은 반역입니다매국적 행동입니다그러나 진리 앞에 라합은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진정한 산 믿음은 다시 말하면 단호한 돌아섬의 행함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수 6장을 보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 가족들을 살려주었습니다더 놀라운 것은 이 기생 라합이 마1장에 보면 영광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아브라함이 남자였다면 라합은 여자입니다아브라함이 유대인이었다면 라합은 이방인입니다아브라함이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면 라합은 인생의 바닥을 산 사람입니다그러나 이 둘은 똑 같이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야고보는 이 두 예화를 들면서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내어놓음이라든지 라합의 돌아섬은 산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계란을 예화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유정란이냐 무정란이냐 이는 그 속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는 열매가 맺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마 7:20절에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며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신앙생활에서 행함이 빠지면 곧 죽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마치 산 사람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면 죽은 사람이 된 것처럼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들에게서 행함 없어지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은 신앙생활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믿음이 없는 행함은 맹목적이 되어버립니다그래서 믿음과 행함은 하나로 연결되어있어야 합니다한 사람이 가진 진실한 믿음은 행함에 의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믿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습니다그 다리를 확인하시고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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