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있는 신앙인 약3:1-12 .2021. 9/5 ⑧
한 사람의 품격, 특히 우리 성도의 삶의 성숙함을 측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태권도 실력이나 바둑 실력은 심사를 해서 단증을 부여하면 되는데, 인격과 믿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데 측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람의 믿음을 측정할 확실한 방법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보면 됩니다. 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여기 ‘온전한 사람’이란 뜻은 잘 갖추어진 성숙함을 말합니다. 말의 실수가 없으면 품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인생에서 언어생활이 2/3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일들이 말로 이뤄집니다.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어떤 일을 해도 다 말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언어생활에서 승리하면 인생에서 승리하고, 언어생활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 실패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좋은 씨앗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맺듯이, 좋은 말을 심어야 좋은 인생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밖으로 표출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된 믿음의 사람은 언어, 혀를 조심해서 사용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야고보는
Ⅰ. 혀는 작지만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3-6절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함께 읽은 말씀은 혀의 강력함을 보여 주는 것들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든지, 배의 키, 그리고 작은 불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5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혀는 작지만, 우리의 몸, 더 나아가 우리 삶 전체를 관장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우리의 삶을 관장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신의 생각도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의 마음은 모두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깨지기 쉬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유리그릇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깨뜨리는 가장 큰 것은 바로 말의 실수입니다. 잘못된 말 한마디가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망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지난 번 강원도 고성·속초와 강릉·동해·인제 일대를 덮친 대형 산불이 일어났을 때 특히 산불이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속초 도심과 해안으로까지 번지며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저도 그 현장에 3번이나 교단일로 가 보았는데 화마로 인해 모든 것이 타버린 그 현장을 볼 때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한 주민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강한 바람이 부니까 불이 강위로 날아갔다’고 말합니다. 산이 불타고 있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그 불이 강을 건너서 건너편 산에 불이 붙는 것입니다. 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온 세상을 다 태울 것 같습니다. 처음엔 조그만 불이 나중엔 이렇게 엄청난 재난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모욕적인 말, 경멸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유리그릇과 같은 그 사람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이기에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혀를 길들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처럼 우리 혀를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큰 배도 키를 잘 조정해서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 혀를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잘 길들여서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 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말을 하도록 하라는 권고입니다. 특히 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여기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한 것은 선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사회나 선생은 필요합니다. 선생이 없는 사회는 막 되먹은 사회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선생이라는 직업이나 지위의 책임이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너도 나도 무작정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말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굴레 씌운다”는 것은 통제한다, 다스린다,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을 조심하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다윗을 생각합니다. 그는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는 신앙인의 품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엄청난 위기의 현장을 만나게 됩니다. 다윗도 너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박해했던 사울을 향해서도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 가는 자기를 향해서 먼지를 떨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향해서 조차도 그는 전혀 부정적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다윗의 심복인 아비새라는 신하가 저 시므이의 목을 따겠다고 말하니까 “가만두어라.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가 내게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그였지만, 그의 눈앞에 충성하던 신하들이 죽어갑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아예 다윗을 매장하려 합니다. 그 때 얼마나 분노와 상실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시141:2절에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면 나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분노로 쏱아낸 말은 줒어 담을 수 없는 치명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성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우리의 말은 한 번 우리 입을 떠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이 내 뜻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지, 이 말이 내가 바라는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지, 혹시 이 말이 누군가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혹시 이 말이 공동체에 나쁜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입니다. 각종 공해로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습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흉보고 헐뜯는 말, 우리의 마음과 삶은 온갖 오염물질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언어의 폭력으로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고식’의 폭력성 글을 보면, 섬뜻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의, 자녀의, 그리고 이웃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아십니까? 쉽게 내뱉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아십니까? 뺨을 맞는 것보다 그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부터도 언어를 바로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습니다.’하면서도 말은 함부로 내뱉습니다. 이럴 때마다 때로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입밖에 꺼내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언어가 우리 신앙인의 품격과 영향이 있는지 아십니까?
Ⅲ. 혀가 우리의 믿음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0-12절에 보면 혀로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10-12절에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예수님도 마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서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야고보의 서신을 ‘작은 산상 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연덕스럽게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하고 아멘도 잘하면서 욕도 잘하고 비난도 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 야고보는 단호하게 표현합니다. 12절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느니라” 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녀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품격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입만 열면 자꾸 허황 된 말을 합니까? 어떤 사람은 왜 말만하면 관계가 깨집니까? 그 마음에 더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믿음이 행위를 낳고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연세대 교수로 수고했던 이규호 씨가 쓴 ‘말의 힘’이란 좋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말을 누에고치에 비유했습니다. 누에가 실을 어디에서 뽑습니까? 입으로 뽑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누에가 입으로 뽑아낸 누에고치 실에 갇히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 됩니다. 민14:28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십 니다.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지 아십니까? 「한국유리」 창업자인 고 최태섭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정직한 기업을 경영하고 기부도 많이 한 기업인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6.25 전쟁 당시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아군이 1.4 후퇴를 할 때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도 피난을 가야 되는데,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만기가 되어서 얼른 갚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급히 은행에 가서 직원에게 대출금을 갚겠다고 했더니, 대출 장부도 없고 피난가야 되니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은행원도 자기 코가 석자인데 이 돈 자기가 가져도 그만이 아닙니까? 그래도 막무가내로 받으라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영수증을 떼어주고 받았습니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제주도로 피난 가서 사업을 했는데, 군부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단장이 그의 정직성을 보고 생선 납품을 요청합니다. 주문 물량이 자꾸 늘어서 부득이 큰 배를 구입해야 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은행으로 가서 대출을 요청합니다. 담보도 없고 전쟁 통이라 돈을 못 빌려준다는 답변이었습니다.
포기하고 나오려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1.4 후퇴 당시 대출금 갚은 것이 잘 정리됐는지 확인해 봅니다. 영수증을 제시했더니 은행원이 깜짝 놀랍니다. 반가워하면서 “바로 그 분이군요! 선생님은 은행가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어요. 은행장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은행장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무담보로 거액을 대출해 줍니다. 은행측에서도 이 전쟁 통에 다들 자기 살려고 난리를 피우는 데 이 사람의 됨됨이에 감동을 한 것입니다. 그 돈을 갖고 사업에 크게 성공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유리」 창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고, 이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나라 과기부 장관도 하셨던 천재 물리학자인 정근모 장로님은 이 최장로님의 모습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말에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 남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처럼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향기가 어떤 것인 줄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으로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한 없이 부끄러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저에게 이 어려운 시절에 야고보서를 강해하도록 하신 이유는 바로 ‘안 목사 너 목회 바로 하고 있는가?’ 하는 질책으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저의 가슴에 깊이 박히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도의 끈을 놓치지 말고 주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 만나서 어떤 말씨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내 말 습관이 달라집니다. 사50:4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
②. 말의 실수를 자백하십시오. 내가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자백하십시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사람들이 정답대로 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편합니다. 정답을 무시하면 말이 길어집니다. 한 달란트를 깊이 숨겨 놓았던 사람이 우리 주님 앞에서 계속 변명했듯이 아무말이나 주워댑니다.
③. 그리고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혀는 길들여졌습니다. 언제 입니까? 오순절날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였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입술이 열려져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 입술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이 땅에서 힘차게 전파하는 입술로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자랑만하던 입술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뽐내던 입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험담하던 입술이었습니다. 그 입술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그 입술이,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힘있게 전하는 능력의 입술이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내 입술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길들일 수 없던 과거는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언어를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주입니다.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찬미하는 입술로 바뀝니다. 성령 충만, 이것은 우리의 입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온전한 능력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혀가, 술에 취하지 않고 오직 성령 충만할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놀라운 생애로 변화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한번 밖에 없는 생애, 우리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 중에 하나인 언어생활, 이 부분이 성정하고 있는가, 내 속에 바뀌어져야 할 언어 습관이나 입에 쉽게 붙어있는 거짓말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없는가 살펴보면서 품격있는 신앙인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