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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지혜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약3:13-18) ⑨ 2021. 9/1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9-12 | 조회: 312
지혜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약3:13-18 ⑨ 2021. 9/12. 

 

어느 은행장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업무 수행을 하고 은행원들의 존경과 박수 속에 명예로운 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그의 후임이 될 젊은 신임 은행장이 그의 퇴임식 지후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선배님, 선배님의 그 성공적인 업무수행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이때 노 은행장은 한마디로 ‘올바른 결정이 제일 중요하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후배는 다시 묻기를 ‘어떻게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다시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경험이 중요하지’ 다시 질문하기를 ‘어떻게 경험을 쌓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노 은행장은 ‘그야 그릇된 결정을 해 보면 알지’

 

그는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만이 우리가 지혜를 획득하는 통로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험 이외에도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신앙적인 통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약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기 무엇을 구하라는 것입니까?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구해서 지혜로운 인생을 살았던 대표적인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는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혜를 구하고 또 주신 지혜를 받아 잘 관리 할 때 비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야고보시대에 믿는 자들에게 엄청난 환란의 바람이 불어 닦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나그네로 뿔뿔히 흩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야고보는 고난 한복판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띄웁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오히려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위축당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말씀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란 의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사건을 분별하고 해결할 수 있는 통찰력”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진 지혜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지혜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때때로 어리석음을 범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부린다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움켜쥐었다고 하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움켜쥔 그것들이 어느새 내 손에서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야고보는 강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고난의 우리의 삶속 뼈 속까지 파고드는데 이것을 돌파할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엔 지혜가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지혜가 있고 땅에서 난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Ⅰ. 거짓 지혜의 특성입니다.

참 된 지혜를 알기 위해서는 거짓 지혜, 잘못된 지혜가 무엇이고 그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야고보는 지혜 중에 거짓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15절에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위에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지혜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합니다. 여기 ‘귀신의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귀신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영들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원어는 디아블로란 말로 사이를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마귀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하면 부부가 분리되고 부모와 자식이 등을 지고, 목사와 교우들이 반목합니다. 노사가 대립하고, 인관 괸계가 파열음을 일으키는 모든 현장이 바로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 현장들에서 일하는 대표적인 귀신들이 바로 시기와 다툼의 영들입니다. 겉으로는 지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과 정욕, 귀신에 속한 지혜라고 말합니다.

 

여기 16절을 보면 거짓 지혜의 특징을 소개 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분열이 일어납니다.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고 편을 가르는 이 결말은 결국 파멸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요즘 ‘아니면 말고식’의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불안심리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는 이유도 있고, 때로는 가짜뉴스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것에 속을 때 짜릿한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고서 그것이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거짓된 정보를 통해서 편을 갈라 다툼으로 번져 마침내 자신과는 다른 쪽에 있는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 자신에게는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정보 가운데 어떤 것인 사실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보낸 정보가 가짜일 때에는 우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의 영에게 속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 /span>의 삶을 뒤돌아볼 때 나의 삶의 자리에는 어떤 흔적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미움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평화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시기와 다툼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희생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욕심의 흔적이 더 많았습니까? 공공화장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아름답고 멋진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간다면, 이런 세상적 지혜로 내 삶이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지혜가 선행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우리의 인격과 삶의 모습이 담긴 멋진 흔적들이 남게 됩니다.

 

Ⅱ. 참 지혜의 특성

이제 야고보는 참 지혜에 대해 설명합니다. 거짓 지혜를 먼저 설명한 것은 참 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참 지혜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영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기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성경이 말하는 참 지혜는 한마디로 경거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 - 그것이 바로 참 지혜입니다. 야고보는 지혜로운 삶의 특징을 몇 가지 소개 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성결한 삶을 삽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결하다’는 것은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거짓과 부정에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더러움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깨끗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담대합니다. 땅의 지혜는 우리로 자꾸만 하나님의 눈을 피하도록 만들지만,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용기를 주고 힘을 줍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두번째 특징은 ‘화평’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는 말로는 ‘살롬’입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굉장히 다양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번영하는 것, 마음에 평화가 깃들이는 것, 사람들 사이에 화목한 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 등의 모든 것이 이 ‘살롬’이라는 말 한마디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관용’이라고 말씀합니다. ‘관용하다’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사려 깊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려 깊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해 준다.’는 뜻입니다. 흔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개입되어 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감정을 따라 사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수시로 변하는 우리의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감정은 절제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인정해 줍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넷째 특징은  ‘양순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양순하다’는 말은 신약성경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만 단 한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은 교만하거나 완고한 태도와는 달리, 합리적이고 기꺼이 들어줄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누구로부터이든지 배울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양순하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기 힘들어 합니다. 거짓과 불의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예수님 주위에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우리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진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창녀에게도 마음이 열려 있었고, 세리와 죄인에게도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그들의 삶을 포용해주는 넓은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에 죄인도, 세리도, 심지어는 창녀까지도 예수님 주위에서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섯째로, 긍휼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긍휼과 동정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그 사람이 부족하든 못났든 그를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 동정은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동정은 때로 교만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그보다 낫다, 그는 나보다 못났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생각의 기초에는 그를 어느 정도 업신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은 때로 교만한 마음에 깃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긍휼은 그렇지 않습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을 얕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줍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가 나보다 약할 수 있고, 나보다 가진 것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편견이 없다”라는 말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를 발휘할 때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거짓이 없다”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남들은 몰라도 진실되지 못하게 행할 때 양심에 거리낌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를 발휘할 때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다 보니 열매 없는 무화과처럼 주님이 기뻐하는 삶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아침 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지혜를 구하며 산사람을 소개하고 마치려 합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이 사역을 하던 고린도 도시에는 엄청난 시대의 두 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바울이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힘이든지 모릅니다. 여기에 대해 고전 1:20-24절에 보면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지금 바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엄청난 부패한 시대 속에 살아가는 삶 속에서 실패하지 않고 어두운 영들에게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만이 승리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 보면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을 합니다. 당시 복음을 무시하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왜 거리끼는 것입니까? 그들이 그토록 주장했던 그리고 기대했던 메시야가 이 땅에 왔는데도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메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거리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헬라인들은 어떻습니까?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얻어 참 인간이 되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인간이 지적 성장을 통하여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계발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은 미개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들의 이성의 잣대로 보면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지혜의 생수가 흘러넘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쳤지만, 주님은 소위 가상7언이라는 십자가의 7마디를 보면 오늘 야고보서가 말하는 지혜가 이 생명의 말씀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강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가서 그 능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힘입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썩은 밀알이 되는 것처럼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그 사람의 힘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진정한 청결과 평화가 어디 있는가를 알기를 원합니까? 여러분, 참된 양심과 거짓이 없는 현장,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며 긍휼의 샘물이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의 샘을 마음껏 십자가에 가까이 나오셔서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 대도 십자가 앞에 선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진동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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