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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은 자의 태도. (약4:6-10) 2021. 10/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10-03 | 조회: 307

은혜 받은 자의 태도. 약4:6-10.  2021. 10/3. 

요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관심 갖는 네플릭스에 방영 되는 프로가 있습니다. D.P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는 탈영병을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의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에 좀 군대 생활의 어두운 면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저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40여년 전 저의 군대생활이 생각 났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예, 맞습니다. 군대 이야기입니다. 한국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예, 맞습니다. 군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남자들이 만나면 다시 군대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그보다 더 강렬한 자극적인 인생 체험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모이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은혜’입니다.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합니다. 주일날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은혜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참 많이 은혜 받았습니다." "아, 저 집사님은 보기만 해도 은혜스러워!" "우리 교회는 은혜가 넘쳐!" "나는 정말 큰 은혜 받았어!" 대단한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다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가 했나요!" 이렇듯 '은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헨'이라는 단어는 '구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원래 은혜라고 합니다. 신학적인 의미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발적인 호의, 영어로는 'Grace'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은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기 은혜가 나옵니다. 그런데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은혜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사도행전 4:33을 보면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라는 말씀이 있습 니다. 큰 은혜란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보다 더 큰 은혜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변덕스럽습니다. 기분과 감정을 따라 생각과 태도가 변합니다. 돕고 사랑 하는 것도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고 풍성해 집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Ⅰ.겸손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구절을 들지 않아도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도록 일관된 성경의 원리입니다. 신구약을 흐르는 동일한 원리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돌아보신다는 것입니다. 잠3:34절에 보면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번 말라기서를 강해했을 때 말3:14절 말씀을 전하면서 저는 엄청난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여기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제가 이 말을 쉽게 말씀을 드리려고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결국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 살 길이 트이는 세상인걸. 못된 짓을 해야 성공하는 세상인걸. 하나님을 시험하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지 않는가!” 여러분, 이것이 당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요 수준입니다.  교만해야 살아남는 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못된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어찌 그렇게 못된 말만 골라 하는지 말입니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보입니다. 세상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못된 짓을 하고 악을 행하고 불법에 전혀 개의치 않고 사는 사람이 더 쉽게 성공하고 출세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보이는 대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산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신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신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처럼 코로나가 창궐하는 가운데 신앙생활하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 대해서 보상해 주십니다. 아니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내가 좀 은혜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배드림이 내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게 뭔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우리도 기뻐해야지요. 그게 참된 믿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 없이 살면서 믿음으로 살면 손해 본다고 헛소리를 합니다. 찬양을 드림으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데, 찬양한다고 무슨 유익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라 살 때 누리는 기쁨과 복이 얼마나 큰 지를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봐야 아무런 유익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자신이 말씀의 은혜도, 말씀 안에서 누리는 축복도 누려보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가 복되다고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 뿐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한다고요? 얼토당토않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이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망하면서도 왜 망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망합니다. 벧전 5:5,6절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더 큰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만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보다 더 강한 은혜의 선물이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큰 요구보다 더욱 큰 은혜이든지, 겸손한 자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Ⅱ.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합니다. 8절
8절 말씀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여기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구약을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이나 성전에는 ‘지성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소에서 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삼색실로 엮은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휘장 안에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 덮개를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시은소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뜻은 '덮는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져 없는 것처럼 사해진다는 뜻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은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1년에 단 하루 정해진 날(7월 10일 대속죄 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에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막 15:38)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이제 지성소를 언제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은혜의 보좌가 있는 시은소에 날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인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4:1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 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너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로 인해서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오늘의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목숨을 끊는 극단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유가 사라지는 위기가 파도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다음 세대의 희망인 우리 청년 세대는 그들이 가진 꿈이라든지 미래가 막혀 있는 현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취업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취업이 되지 않아 ‘취업한파'라는 말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서 취업의 문은 더 좁아지고 아르바이트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취업한파'라는 말 대신에 취업 빙하기'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직장에 취업하고 가정을 꾸린다 하더라고 내 집 마련은 더욱 요원해졌습니다. 요즘 어느 젊은이는 퇴직금을 50억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할 때, 먹먹해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불안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망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뭔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의욕을 갖고 뭔가를 하려고 해도 해 볼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절망감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우리 마음에 꽈리를 트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진짜 절망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삶속에서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시73:28절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마음이 답답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낙심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다. 그렇게 사랑하여 구원한 당신의 백성인데,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한 당신의 백성인데, 우리가 좀 연약해서 쓰러졌다고 우리를 모른 척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Ⅲ. 회개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합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문제를 만날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이 시기가 나를 더욱 성숙하게 하기 위한 연단의 시간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앞에 세우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은 고난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쓰시기 전에 꼭 고난의 학교에 입학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학교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119편 67절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71절에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며 고난의 유익을 말씀했습니다. 때때로 고난이 닥치면 한숨도 나오고 눈물도 나오고 심하면 낙심도 되고 좌절도 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부족함 앞에 회개의 자리에 오래 오래 머물며 산 사람도 드뭅니다. 시30:4-5절에 보게 되면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는 고백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나에게 슬픔이 있지만,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소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은혜 앞에 머물면서 항상 다윗이 가장 그의 생애에 놓치지 않았던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여기 9절에 보면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합니다. 울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좀 잘된다고 여유부리다간 한 순간입니다. 더욱 은혜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모습을 보며 울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할 때 주님과 친밀한 관계 안으로 나아갑니다. 임재는 회개의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더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 집니다. 회개의 깊이가 친밀함의 깊이 입니다. 죄가 가로막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우리의 삶 속에 회개하는 삶을 산다면 언제 어디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더 큰 은혜’에 잠기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묻습니다. 하루라도 거울 앞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몰골이 어떻게 될까요? 

이해인님의 ‘거울 속에 내가'라는 시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 나는 내가 낯설어 / 도망치고 싶습니다” 이 시인의 고백처럼 그런 경험이 없으셨나요? 한순간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본 내가, 나도 내가 본 내 자신이 너무 낯설어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없으셨나요? 나도 나를 보고 내 속 모습이 너무 끔직하고 잔인해서 놀랍던 적이 없으셨나요? 내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지, 내가 왜 이렇게 교만한 자가 되었는지... 내가 왜 이렇게 욕망의 포로가 되었는지... 내가 왜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채 왜 이렇게 증오의 포로가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큰 은혜 앞에 선 우리는 내가 왜 이렇게 두 얼굴, 두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통곡하고 애통할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 말로 참회의 시간이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그 눈물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씻을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실 때 거울 속에서 보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 더 큰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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