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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슬퍼하십니까? (요20:11-18) 2010.4.4부활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4-06 | 조회: 1948
지금 우리나라는 서해안에서 침몰된 군함 속에 생사를 알지 못하는 해군 사병들로 인해 큰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생사를 알길 없는 자식을 가진 부모와 그 형제들의 절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내게 합니다. 또 전우를 구하기 위해 50십이 넘은 군인이 조류가 거센 물속에 수십 번 들어갔다가 결국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또 이들의 구조 작업을 돕던 민간 어선 한척도 바다에 침몰되는 소식 앞에 또 한번 국민들은 슬픔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국민들은 지금 답답한 심정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정도로 비통에 잠겨 있습니다. 이 안타까움을 반영이라도 하듯 천안함 실종 군인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명령하는 글이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덕규라는 분이 해군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772함 수병은 귀환(歸還)하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772는 천안함의 고유 식별번호입니다. 제가 그 글의 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772함 수병(水兵)은 귀환(歸還)하라

772 함(艦) 나와라/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두움도/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772 함 나와라/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그 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하라./



772함 나와라/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浮上)하라/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772함 나와라/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 갈 때 까지 버티고 견디라./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전선(戰線)의 초계(哨戒)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대한민국을 보우(保佑)하시는 하나님이시여,/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하소서/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의 아들들을/차가운 해저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지금 절망의 한 복판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부르짖는 이 모습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누구나 두려워하고 절망케 만드는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죄값의 결과입니다. 죄는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죽음보다 이 세상에 강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이 왕 노릇 한다고 말했습니다. 폭군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여러분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 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여인이 죽음 앞에 처절하게 통곡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우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눅8: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노리개감으로 버려진 쓸모없는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았던 그녀는 남들이 무서워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마져 마다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남들이 다 자는 어두움이 짙게 깔린 새벽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은 무덤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눅24:1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 虛' 즉 아무것도 없다는 ‘허’와 ‘거짓 誕’ 혹은 ‘속일 誕’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즉시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켜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대로 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허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 현장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뛰어 너머,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부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절을 보세요.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현장에 들어간 두 번째 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생각하려 하지도, 없어진 주님을 찾아 볼 엄두를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본문 1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그들은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랐건만,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건만, 아무 생각 없이 베드로와 요한이 그냥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당시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과는 달리 다시 무덤을 향해 막달라 마리아가 갔지만, 그도 부활을 믿은 게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것 때문에, 그리고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다시 무덤을 향하여 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우리 인생들의 첫 반응입니다. 지금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할 시신이 사라져 버린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11절 상반 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있더니"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애곡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이 처럼 죽음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여기에 누가 예외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며칠 전에 자신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 들었던 고 한주호 준위의 빈소를 찾았던 이명박 대통령은 말을 잊었습니다. 도대체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부인인 김씨가 "대통령님…."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방명록에 '한주호 준위, 그토록 사랑한 대한민국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적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 무슨 위로를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도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는 현장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처럼 하염없이 우는 여인을 향해 13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는 이 음성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 아닙니까?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모습이셨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야!! 동산지기라면 마리아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이 무서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예수님을 무덤에다 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을 굴려 가지고 그 어구를 막았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빌라도의 어인을 가지고 봉인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군사들을 동원해 밤낮없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 순간을 보면 죽음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그 무덤에 갇혀있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손을 쓸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는 자 앞에 죽음이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지키는 것도 헛수고요, 인봉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요, 아무리 군사를 동원해도 다시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15: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러분 죽음 앞에 서서 쩔쩔매지 마십시오.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 예수님 해결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미 부셔 뜨리셨습니다. 지옥의 권세를 이미 멸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해결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17절 상반 절에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을 때에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독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눈앞에 저 처절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그리고 무참하게 죽으신 그 주님이 이처럼 다시 살아났는데 그 감격, 그 기쁨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이 순간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아침! 우리 모두가 부활을 기뻐합니다만, 이제 우리의 숙제가 있습니다. 과연 나도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확신이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새벽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은 향나무처럼 사셨습니다. 향나무는 찍혀도, 찍혀도 향을 발합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발라줍니다. 향나무는 흉기를 향기로 바꾸어줍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용서의 향기였고 사랑의 향기였습니다. 축복의 향기였고 인내의 향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흉기가 향기로 바뀐 사랑의 현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흉기로 찌른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이 마치 제철을 만난 듯이 이리저리 교회를 흔들고,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며 사회도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어떻게 이제 갓 초등학교를 다니는 여아를 그렇게 성폭행하고 난도질해서 정화조에 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망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암담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를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고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통곡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이 부활의 참 기쁨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 날 그녀는 자신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에 ‘부활의 기쁨’을 담기 시작할 때 그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관하지 마십시오. 허무를 가지고 한숨 쉬면서 눈물을 짓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하나님은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길을 예비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보십시오. 십자가는 막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그 막다른 길 저편에 부활의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절은 회복의 절기입니다. 고갈된 능력을 주님과 연합함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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