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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비방하지 말라 (약 4:11-12) 2021. 10/1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10-10 | 조회: 273

서로 비방하지 말라 (4:11-12) 2021. 10/10 

 

지금 세계인들이 우리나라를 보는 시각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여 국력이 달라지면서 생겨나는 일입니다. 특히 K-Pop, K-Food, K-Beauty, 심지어 K- 드라마, K-방역과 같은 말들은 외국 언론이나 인터넷과 유튜브 영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예를 들면 자신들이 잘 사는 줄 모르는 유일한 나라”, “재미있는 지옥”, “갈등공화국등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개운치 않습니다. 밖에서 볼 때 잘살게 됐고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이긴 한데, 자기들끼리 너무 비방하며 갈등하면서 지옥처럼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방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영 간의 이념갈등, 세대갈등, 젠더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등이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합니다. 게다가 점점 늘어나는 소득격차, 치솟는 부동산가격으로 인한 박탈감, 교육 불평등에 코로나로 인한 피로감까지 겹치면서 우리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핏대를 올리며 비방하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방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방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 비방하지 말라고 명령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비방의 문제가 심각하지만, 초대교회시절 교회 안에 서로 비방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방이 그치라고 권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성경원어 카타랄레오’(καταλαλέ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얕잡아보다”, ‘얕잡아 말하다는 뜻입니다. 좀 더 풀이하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내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대방을 깍아 내리는 행위입니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 그를 사랑해서 잘못을 알려 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서의 핵심은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삶이 없는 신앙생활에 대해 이게 얼마나 문제냐면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여러분도 늘 고민이 무엇입니까? 내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자기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습관보더 더 바꾸기 어려운 것이 성품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생각이나 성품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우리에게 그것을 버려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띄울 때, 당시 핍박을 피해 흩어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 너무도 큰 상처를 가진 자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한번 상처를 입게 되면 이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에서 고름이 나옵니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몸을 썩게 만듭니다. 그런데 육체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깊어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지 않은 채 두면 마음에는 쓴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잘못하면 절제력을 상실한 채 분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고, 피해의식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비방의 문제가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비방하고 있습니까?

 

. 비방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11절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여기 형제들아라고 부르는데 이 짧은 문장에 세 번씩 형제라는 단어를 골라 사용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형제를 판단하는 자라고 한 이 말씀 속에 비방하고 비방당하는 너희는 서로 어떤 관계인지 의식하라고 형제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거듭 사용하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는 자주 가까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아껴주고 격려하고 칭찬해야 할 형제들을 헐뜯고 있습니다. 서로 비방하는 것은 자기 살을 씹어대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의 형제들을 비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를 짓뭉개는 일입니다. 우리에겐 신앙의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도 땅위에는 없습니다.

 

여기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그것은 율법의 재판관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자신이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볼 때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죄와 나의 죄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 비방하는 행위가 왜 죄인지 아십니까? 11절 중반 절에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여기 율법이라는 단어는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비방하는 것이 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재판자가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핵심을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모두 중요한 것 같지만,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씀 중에 자가 붙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대 사명대 계명입니다. 대사명은 마 28:18-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이는 주님의 유언의 말씀이고,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대 명령입니다. 그리고 대계명은 마 22:37-38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준 목적이요 율법의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비방한다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 마음의 상처 가운데 가장 많은 상처가 바로 비방하는 말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69: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비방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비방의 말을 들을 때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게 아팠습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산산이 부셔졌다는 뜻입니다. 스스 로 자기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좋은 다윗도 비방하는 말을 들을 때에 그렇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너무 힘들어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요즘도 아니면 말고식의 비방이 인터넷에 마구 쏟아냅니다. 소위 악풀러라고도 합니다. 이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견디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깨지기 쉬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유리그릇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깨뜨리는 가장 큰 돌맹이는 바로 비방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망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3: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모욕적인 말, 경멸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출소하는데, 교회 성가대가 와서 축하해주고 전도사가 두부를 주면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때, 금자씨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풍자적인 말입니다. 감옥 밖에서 잘난 체하며 사는 사람들, 그러나 감옥 안에 있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면서, 성가대의 출연이나 전도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는 영화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인인 것처럼, 수준이 높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은 들킨 죄인, 밖에 있는 사람은 안 들킨 죄인일 뿐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십시오.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여기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요즘 우리가 언론을 통해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내로남불입니다. 남을 거칠게 비방한 사람이 알고 보니,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거나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자기가 한 것은 로맨스라고 하고 남이 한 것은 불륜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자신이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재판관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판단이라는 원어의 뜻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이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죄의 유무를 재판하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알면 남을 함부로 판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정죄하는 비방의 말을 삼가야 합니다. 그런 행위가 교회와 관계 된 모든 것을 다툼으로 몰아놓고 분열을 일으킵니다. 7:1-2절에 비핀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핀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가지 꼭 조심하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 아내나 남편 부모 형제 목장식구, 같은 부서를 섬기는 모두가 이웃일 수가 있습니다. 때로 내 마음에 안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못마땅할 수도 있지요. 그래도 판단하거나 비방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부릴 대상이 아니라 섬길 대상입니다.

 

삼상 24:12를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엔게디 광야를 수색하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한 굴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거기에 다윗이 숨어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고 사울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몰래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는 살려주었습니다. 이후 먼발치에서 다윗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리면서 한 말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스스로 사울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있었지만 손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심판주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다윗처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세우신 사람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처분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비방하는 자가 아닌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비방보다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누구라서 격려가 필요 없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성도와 성도간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격려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어 달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비방으로는 사람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비방은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격려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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