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면 안 됩니다. [새생명 축제] 룻1:1-5. 2021.10/17
오늘은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로 모두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 귀한 사역 앞에 우리 마음이 무거운 것은 2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코로나 19의 위세는 아직도 멈추질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는 몇 달만 참으면 전염병이 멈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오래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또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코로나19 전염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로나의 종식이 아니라, 코로나와 함께 가야 한다고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후보를 검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들은 없습니다. 정치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만 답답할 뿐입니다. 이런 무거운 사회적 상황이 맞물리다 보니 교회가 전도 하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보세요. 코로나로 믿는 자마져도 교회 나오는 것을 조심하는데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곳에 초대한 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는 것도 현실입니다. 예전에 교회 잘 나오던 분들 가운데 아직 교회 한번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신앙의 위기가 서서히 밀려오고 있는 이때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때일수록 더욱 위기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집중을 해야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작가라고 불리는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환란이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생을 향해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확성기이다.’ 여러분, C. S. 루이스가 왜 시련과 고난을 ‘확성기’라고 표현했을까요? 세상에 물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굳게 닫혀 있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세상의 소리에 귀가 가려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현대인들, 자신의 욕망의 소리에 매몰되어 그 욕망을 따라가느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현대인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은 시대를 살아갔던 한 가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살던 시대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알려줍니다. 여러분,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입니까? 사사시대라고 하면 우리의 머리에 어떤 이미지가 그려집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사기 2:10절에 그 상황을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조차 알지 못한 세대가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거짓된 우상을 섬겼고,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듯이 그 시대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사사기 17:6, 21:25)
Ⅰ.흉년 앞에서
여기 1절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당시 가장 암울한 시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농사를 지어놓아도 이방 민족들이 와서 다 빼앗아 가버렸기에 늘 마음 졸이며 농사를 지어야 했고, 마음껏 먹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기근으로 인해 흉년까지 들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사사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는지를 오늘 본문은 재미있는 방법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살던 곳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뜻은 ‘떡집’입니다. 떡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먼 이국 땅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마지막 곡식이 남아 있는 곳이 떡집입니다. 사람들이 마지막 남아 있는 곡식으로 먹을 것을 만드는 장소가 떡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큰 흉년이 들었는지 떡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먹을 양식인 떡을 찾아서 떡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에서 당시 그들의 모습을 아주 회화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떡집을 떠난 가족의 가장이 엘리멜렉이라고 소개합니다. 엘리멜렉이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엘리멜렉이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가 그에게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을 가진 그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할 엘리멜렉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데, 엘리멜렉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떠나 곡식이 풍부하게 난다는 모압이란 나라로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 가장 비신앙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간 모압 땅에서도 그 가족에게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모압 땅에 거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가족은 어머니와 두 아들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남은 두 아들도 그 땅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결혼을 했는데, 그 아들들마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이라는 이름은 ‘병약하다, 쇠약하다’는 뜻입니다. 기룐이라는 이름 역시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환자, 비쩍 마른 놈’ 그렇게 짓고 싶었겠습니까? 어쩌면 두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허약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허약한 두 아들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두 아들은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두 아들 모두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마저 낯선 이방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압 땅에 산지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흉년에 먹을 것을 찾아 나선다고 낯선 이방 땅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울타리가 사라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힘든 일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 마져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기구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두 며느리뿐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삶입니다. 행복을 찾아 이방 땅에 찾아온 이 가정은 이제 나오미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방 며느리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인생이 되어야 할 나오미에게 기쁨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나오미에게 기쁨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Ⅱ. 남았더라
여러분, 이 가정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이 가정이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원인은 떡집을 떠났다는데 있습니다. 이 가족이 고통을 겪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난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인생의 고통과 비극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인생에 큰 경험이 되기도 하고, 그런 도전을 통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살면서 결코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결코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여러분, 5절에 “말룐과 기룐 두 사람이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는 말씀은 참 가슴 아픈 표현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던 고향마져 등졌지만, 10년 만에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서 가졌던 두려움, 낯선 땅에서 사랑하고 의지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마져 자신의 곁을 떠났을 느꼈을 절망과 통곡, 그 모든 것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 때 나오미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절규했을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남겨졌다.’는 말 한 마디로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만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가족이 내 곁을 떠나기도 하고, 때로는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등 돌리고,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나만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 때가 우리에겐 기회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다 사라졌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절망감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우리 마음에 꽈리를 트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진짜 절망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랄 때 찾아옵니다. 그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밤하늘이 캄캄할지라도 그 속에서 흐릿한 별빛 하나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우리 안에 소망이 생겨납니다. 인생의 모든 줄이 다 끊어졌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한 줄 만으로라도 노래하려 노력을 할 때 우리에게 소망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Ⅲ. 포기하지 말라
그러나 룻기서는 이것을 끝나지 많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던 모압 땅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실패의 자리, 고통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이야기가 룻기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다시 일어서는 그래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룻기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다시 돌아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룻이라는 딸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를 동행하게 하셨고, 아들보다 더 든든한 보아스라는 청년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윗 왕의 조상이 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홀로 있던 나오미이지만,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삶을 회복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한 복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새생명 축제때 여러분의 중심을 보십니다. 내가 과연 영혼 사랑하는 의지가 있는가말입니다. 이번 새 생명 축제에 내가 새 생명으로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여러분 가운데 한동안 탕자처럼 방황하지는 않았나요? 요나처럼 내 고집을 꺽지 않고 불순종하지는 않으셨나요? 저 고멜처럼 세상을 기웃 거리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쏟아 내 메마른 심령에 생수를 부으시는 자리가 이 자리가 아닙니까? 전도할 힘도 없고, 헌신과 열정도 사라지고, 그냥 세상에 파묻힌 초라한 내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나를 이 자리에 앉히시고 나를 세워 새생명의 회복자로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이 주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내가 잠시 방황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을 멀리했던 내가 다시 생명을 찾는 자리가 축제의 자리가 아닙니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처음 예수 만났을 때 숱한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견디지 못해 내 한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다짐하며 믿음의 동산에 들어섰는데 벌써 그 사랑이 식어져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왜 그것이 식어지는 지 아십니까? 이는 사명의식의 결여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사명의식이 없을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방황'이라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 우리 인생에 있어서 방황, 그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더 무서운 방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방황입니다. 방황은 눈에 안 보여요. 남자고 여자고 마음속에 이루어지니까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번뿐인 인생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 방황입니다. 그 방황 빨리 끝내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 마져도 꺼뜨리기를 심히 원치 않으시는 그 주님의 가슴에 내 인생을 던지셔야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그 분은 당신이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다 사라졌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이 아무리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절망감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감이 우리 마음에 꽈리를 트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진짜 절망은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것이 우리의 소망일 수 없습니다. 연단과 시련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믿음 깊이에 섞여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세상의 욕망과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거짓된 교훈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을 돌아보시고 우리가 이때 가족 구원과 이웃 전도에 대한 열정이 다시한번 불타기를 바랍니다.
시련은 때로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고, 영원한 것을 소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시련은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바로 금보다도 귀한 믿음이고,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삶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리를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돌아갈 아버지의 품,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계십니다. 그 은혜 앞에 서는 것이 새 생명입니다. 이 터치 153새생명 축제에 나의 신앙을 점검하고 다시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