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 감사 합 3:16-19. 2021. 11/14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 위에 주의 위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라는 극한 상황은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들어보지도 못한 ‘팬데믹’이란 말이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대량살상 전염병으로 인해 지구촌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에 쓰는 그 말이 우리 시대에, 그것도 최첨단 과학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그런 용어가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누적 인구가 2억 5,000만명을 돌파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들이 적게는 500만에서 1,000만이라는 믿지 못할 통계는 우리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습니다.
제가 여러나라의 지진의 현장을 가 보았지만, 그 현장은 실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현장입니다. 이번 코로나19는 마치 이런 지진재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건물의 토대를 흔들어 약한 건물은 붕괴시키고, 일반 건물들은 파괴시키고, 그리고 강한 건물들도 부분적으로라도 훼손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이번 코로나사태는 ‘물적 토대’를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국가 경제적 측면에서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았고, 소상공인들은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다음으로 ‘정신적 토대’를 뒤흔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소위 ‘코로나블루’(Corona Blue)라는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많은 가정에서 가족 간의 불화가 일어나고, 아동학대나 이혼이 늘었습니다. 청년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토대’에 충격을 가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온라인으로 예배당이 아닌 저마다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교인들의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모임이 중단되면서 대부분의 교회사역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질병청에 통계에 의하면 교회수가 65,000정도 되는 데 10,000 교회가 문을 닫았고, 위드 코로나로 전환을 했지만, 여전히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숫자에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도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와 같은 위기의 시대에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 고통 한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했던 사람,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안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통의 현장에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하박국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며 종교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은 타락과 부패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국제 정세까지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던 애굽은 이제 국운이 기울어 더 이상 유다를 도울 수 없었고 신흥 제국 바벨론은 강대국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시시탐탐 유다를 노리면서 멀지 않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 나라를 침략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유다는 내적, 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선지자로서 누구보다도 이런 급박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하박국은 가슴이 떨리고 두 다리에는 힘이 다 빠졌으며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이 처한 현실은 한마디로
Ⅰ. 감사의 이유가 사라진 위기 상황입니다.
당시는 BC 7세기 경인데 고대 근동 지역에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심각한 죄악 가운데 신앙도 도덕도 타락한 유다 백성을 징계하려고 작정하십니다. 그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시려 합니다. 하박국이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 심적 부담과 고통이 어떠했는지 본문 16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러한 전쟁의 위협 가운데 유다가 처한 조건은 처참할 정도가 됩니다. 여기 얼마나 두려웠으면 ‘내가 기다리므로’라는 표현을 했습니까? 이 기다림은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올 엄청난 재앙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등입니다.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Ⅱ. 하박국이 감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 : 나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본문 16-17절의 암담한 분위기가 18절에서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16-17절에서는 유다가 처한 위기 상황을 서술합니다. 전쟁으로 징계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농사를 망치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 등. 이렇게 하고 18절은 원문상으로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록된 겁니다. 마치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데 저 건너편에서 한 줄기의 찬란한 광채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답답했던 것이 확~ 뚫리는 기분입니다. 하박국은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오히려 감사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 감사, 찬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간 조건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지만 여전히 자기에게 남아 있는 소중한 게 있음을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구원이 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 세상 모든 게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18절을 보세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에 있어서 소유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합니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가질 수도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도 있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돈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하더라도 돈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좋아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물질의 노예,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면 아무리 천만금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식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으로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겨납니다. 그 세상의 욕망 가운데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우리 영혼에 유혹해 오는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 때문에 견고하던 나의 신앙의 금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지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소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의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헬레스코스타라는 지방에는 6백만 유대인들을 비참하게 집단 학살했던 인간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이 가마솥에서 연기로 사라졌습니다. 당시 이 죽음의 현장에는 유대인들의 피맺힌 절규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용하셨습니까?’라는 외침이 수도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유대인들이 죽어갔던 수용소를 탈환하여 수용소의 벽을 살펴보다가 한구석에 희미하게 기록된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두루마리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할 수 없겠네!” 지옥과 같은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글귀를 발견한 이들은 그 벽 아랫면을 보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God is here).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 지옥과 같은 절망과 잔인한 학살 가운데서도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고 계시다’는 고백을 드렸던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 놓이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마저도 이길 힘이 있습니다.
Ⅲ. 감사는 기적의 씨앗입니다.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 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바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자!! 따라 합시다. 이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에게 감사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심을 확신하는 자에게 반드시 감사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승리의 기적을 맛보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한 주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감사’란 주제로 새벽 특새를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새벽을 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1:38에는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early each morning"이란 말은 "날마다 아침 일찍이"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이른 새벽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습관을 알고 이른 새벽에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한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벽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새벽은 응답의 현장입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홍해 역시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으로 버무려졌던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번 새벽 특새를 시작하면서 저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동성교회의 새벽기도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부흥의 진원지가 되고, 그동안 코로나19로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와 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영적 생수의 발원지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의 진자리 마른자리를 통하여 갈급한 심령에 은혜의 물꼬가 터지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새벽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충심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이번 한 주간 모든 교우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걸음을 재촉하는 많은분들로 이 본당이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그 현장에서 소외되는 자가 없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감사하는’ “믿음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