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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삶을 바칠 것인가?-성례식 (롬 6:1-13). 2021. 11/2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11-28 | 조회: 296

어디에 삶을 바칠 것인가?-성례식 롬 6:1-13.2021. 11/28. 288. 341

 

 

얼마 전에 tv 드라마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왕이 되는 것도 힘이 들고 그 왕권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도세자를 알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정말 불우한 왕의 후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은 당시 천주교인이란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왕조에 왕가에 대가 끊기게 됩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 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 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 집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강화도에 살았던 강화도령으로도 유명한 철종입니다. 이 강화도령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조선 25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강한 단어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사는 많은 성도 가운데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휘둘리고, 마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기도합니다.

 

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깊이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특별히 이 아침 성령이 나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식이 있고 또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주의 성찬을 받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우리가 티끌만도 못한 존재였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땅히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우리인데, 그런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그 귀한 사랑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로 세워주셨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오늘 본문은 내가 누군가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죠?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합하여' '연합한자'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고 또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죽고 이제 새로운 생명, 영생을 얻은 연합된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로서 우리는 내 지난날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5:6에 보시면 지난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좀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경건치 않은 자'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자,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죄에 찌들대로 찌든 불신과 음란과 거짓으로 물든 소망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격 없는 자, 이 소망 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 황혼에 한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당신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믿는 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복음을 방해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로 살아온 나를 당신의 능하신 손길로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신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소망을 주신 하나님! 내가 어찌 이 사랑! 이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그 날부터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어떤 핍박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신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져주신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지난날에 나의 연약함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는 이 명령형의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나의 통장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을 때 그것은 현금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라'고 할 때 씌여진 것입니다. '여기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캐쉬 카드'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통장에 돈이 있을 때 비록 조그마한 카드지만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기다''생기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통장 안에 돈이 있습니다. 부도나는 통장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찾아 쓰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고난의 자리에서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4: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은 허세가 아닙니다.

 

4:11-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바울은 여러 환경 조건에 처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귀족이었습니다. 박사요 로마시민권자이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서 가난과 궁핍도 경험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백합니다. 이제 환경 조건이 어떠하든 다 적응할 수 있고, 그 가운데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다는 겁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온도계와 온도조절장치의 차이와 같습니다. 온도계는 주위 환경 조건에 따라 변화됩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함께 내려가고, 기온이 올라가면 함께 올라갑니다. 반면에 온도조절장치는 어떻죠? 주위 환경 조건을 극복합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올려주고, 기온이 올라가면 내려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도계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형통할 때는 교만해지고, 고난의 때에는 낙심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도 조절장치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형통할 때는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히 감사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감사했습니다. 당당한 삶이 아닙니까?

 

. 이제 내 삶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여기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여기서 나타나는 무기라는 단어는 영어의 weapon이 아니라 도구라는 뜻의 instrument입니다. instrument라는 단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한다면 바이엘 10번 정도 그것도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 교회 성가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소리가 달라집니다.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여기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서 드리라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의지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합당한 수준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몫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치열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서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할 것인가, 마귀에 종노릇 할 것인가, 어디에 내 시간과 물질과 삶을 드릴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는 결코 철종형 그리스인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하는 결의를 가지고 감격하며 고백하며 세상 앞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도가 일어나고 온 땅에 백성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믿는 이 열매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이 고백 앞에 예수님의 피,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며 나의 연약함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으로 일어서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앞에 가는 그날까지 이젠 더 이상 땅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임과 동시에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 주를 위해 아끼없이 드리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 당당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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