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참으라 약 5:7-11. 2021. 12/5 ⑮
아마 이봉주란 마라톤 선수를 잘 알 것입니다. ‘봉달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봉주는 한국 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이 아닙니까? 2001년에는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각종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우리나라 마라톤계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희귀질환인 근육긴장 이상증 병에 걸려 뛰지도 걷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근육이 제멋대로 비틀어지고 통증에 시달리는 비참한 자리에 빠졌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11/말에 1,2km를 뛰었습니다. 거의 기적입니다. 그는 마라톤을 마친 후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며 다시 재기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풀리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도저히 일어설 수 없고, 희망이라곤 가져볼 수 없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우리의 마지막 자리는 아닙니다. 힘든 걸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움직여서라도 결승선을 통과한 이봉주처럼 때로는 우리도 그 힘든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힘을 얻어 다시 달려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다섯 절밖에 되지 않지만, 이 다섯 절 안에 ‘인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물론 한국말 성경에서는 ‘길이 참으라’ ‘길이 참아’ ‘길이 참고 ’오래 참음’ ‘인내’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와 ‘휘포모넨’라는 두 단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둘 다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는 '관계 안에서의 인내'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고통을 참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휘포모넨’은 '환경 속에서의 인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부도가 났다든지, 대학시험에 떨어졌다든지, 몹쓸 병에 걸렸다든지 하는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타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향에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갖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덜한 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거기서도 삶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뼈속까지 파고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든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인내를 온전히 이룬다는 것, 곧 길이 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격려와 아울러 성도답게 당당하게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 기자는 그것이 관계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환경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를 설명하면서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인내의 모델은 농부입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팔레스타인에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비가 내리는데, 이것을 '이른 비'라고 합니다. 이 이른 비는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리고 '늦은 비'는 3월에서 4월 동안 내리는데, 이는 곡식을 자라게 합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이른비와 늦은 비를 위해 농부가 할 수 있는것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간절하게 두 손모아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농업은 하늘과 동업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야고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농사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인들의 기다림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도했으면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참는 정도를 어느 정도 해야 합니까? 묻는 성도들에게 ‘길이’ 참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길이’란 ‘오래오래’란 뜻입니다.
때로는 가뭄 때문에, 때로는 홍수 때문에, 어떤 해에는 태풍 때문에 아무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종자를 먹어치우면 안 됩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창자가 등에 붙어 버릴 정도로 배를 곯으면서도 다음해 씨를 뿌릴 종자는 남겨두어야 하는 그 인내가 농부에게는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농부의 인내는 큰 교훈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는 것처럼 길이 참는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있습니다. 시126: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동안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혼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더니 애가 생기지 않아 고생하다가 아이를 낳습니다. 천하를 얻은 것 같았는데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까? 공부, 공부, 공부, 대학가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취직, 취직, 취직, 취직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나이 들면 병들고, 노후 걱정, 자식 걱정, 끝이 없는 게 인생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오늘도 눈물로 씨앗을 심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안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농부는 거북등같이 타들어가는 논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농부가 길이 참고 기다려 귀한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참고 기다려서, 응답을 받고 상급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내의 모델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인내를 배우라 10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성경에 보면 많은 선지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옥에 수도 없이 들어갔으며 심지어는 산채로 구덩이에 던져지기까지 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나라 잃고 어릴 때부터 이방 땅에서 살고, 나중에는 사자 굴에 던져지기까지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 때문에 이방 땅에 끌려간 다른 동족들과 함께 몰살당할 뻔 했습니다. 또 신약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오래 참았던 선지자들을 모델로 삼으라고 합니다. 사명을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끝까지 인내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명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고 말씀하셨고, 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끝까지 견딜 때 구원을 얻으며 영광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사명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는 고난을 끝까지 잘 견뎌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세 번째 인내의 모델은 욥입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 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 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욥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모든 면에서 고난을 당하였으나 인내하므로 승리하였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만큼,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자녀 십남매를 두고, 수 많은 재산과 종을 거느렸던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재물과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온몸은 악창이 들어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버림을 받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든지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욥1:20절 이하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말하기를 “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커다란 고난을 단련의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욥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뎌서 갑절의 축복을 받았고, 정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기다림이 길어질 때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원망입니다. 인내와 원망은 대조적 현상입니다. 인내가 식어질 때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9절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누구나 할 것 없이 고난이 찾아오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부패하고 타락된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서로 원망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내로남불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떤 일이 잘되면 자기 때문에 잘되었다고 자기를 칭찬하고 고난을 당하면 이것은 다 누구 때문이라고 서로 원망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많은 표적과 능력을 행하여서 그들을 구원하였음에도 광야에서 조금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그들은 먼저 원망하고 불평부터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에는 불평과 원망한 무리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세대가 들어간 것입니다.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재판관이 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하나님만이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심판주가 문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심판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심판장이신 우리 하나님께 맡기고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0장 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 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원망하면 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교회 일도 원망하지 말고 하라고 말씀합니다. 빌2: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야고보가 기다림을 강조하며 그 과정에서 원망이라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를 간구하며 우리에게 놓쳐서는 안 될 메시지를 줍니다. 다시 7절을 다 같이 보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8절 말씀에도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강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재림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나면 서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란, '주님께서 오시고 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극악무도한 로마의 핍박과 압제 아래서, 순교의 잔을 마시며 죽기를 각오했던 성도들의 신앙은 바로 '마라나타' 신앙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고 계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참고 견딤으로 이 땅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죽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저들은 죽어가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웃어가면서 죽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네로 황제로서는, 도저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웃으면서 살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감이 되어가면서 또, 십자가에 달려 화형을 당하면서도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송하며 신앙의 정조를 지켰습니다. 죽음조차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 속에 살아 있었던, 부활신앙과 또한 재림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이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를 말합니다. 이 예수의 오심은 초림과 재림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바로 초림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림의 메시야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가 첫 성탄의 주인공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그 기다림으로 인생을 바쳤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안나와 시므온은 성전에서 오랜 기다림 속에서 결국 초림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섬김과 나눔으로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위로를, 당시 사회의 외톨이들에게는 친구로, 심지어 원망 불평하는 자들에게는 온유와 겸손으로 그들을 끌어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 하나 남기시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바로 이 땅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의 사건이 아닙니까? 바로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염두에 두고 ‘길이 참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분명 다시 오십니다. 이제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으로 사십시다.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을 감당할 때,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림에는 때로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다림에는 그 어떤 고난이나 아픔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처럼,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선지자의 외침처럼, 욥처럼 판산 당하는 자리에서도 인내의 향기가 필요 합니다. 간절한 기다림의 결과는 승리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