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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무릎으로 산 사람 - 야고보 (약 5:13-18) 2021.12/12. ⑯ 마지막회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12-12 | 조회: 615

낙타 무릎으로 산 사람 - 야고보 (5:13-18) 2021.12/12. 마지막회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는 명령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강도가 평범하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래 놓고는 또 찾으라, 그리고 또 문을 두드리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부르짖으라, 마음을 토하라는 이런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이 기도하라는 하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힘을 주어 말씀하는 것을 보면 기도하라는 내용이 그렇게 듣고 지나갈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인 토사이드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범죄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죄가 무엇이냐. 그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다.’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기도가 무엇인냐 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중에 가장 쉬운 길이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가 참 쉬운 것 같이 보여도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한 줌의 흙으로 빚어져서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정말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까? 이런 존재가 누구하고 대화하는 것입니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으로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대화 하는 것이 기도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쉽습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두시간 엎드려 기도해도 하나님은 일언반구 대꾸도 안하십니다. 어떤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하심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그런 임재하는 경험이 싹 물러날 때도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로써 이 야고보를 마치려 합니다. 그동안 야고보를 다루면서 큰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전받는가 하는 것을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야고보는 아마 예수를 믿기에는 가장 힘든 환경 속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당시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으로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에서 적어도 25년이 넘도록 예수님과 함께 해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355절이나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쫓아다니며 말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에 들어서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부활의 증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 열두 사도, 오백여 형제가 만났고 야고보가 만났습니다.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는 형님이었던 예수님을 더이상 육신으로만 알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형이었던 예수를 향해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야고보 시대에는 은 아주 경멸스럽고, 말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반란과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당한 청년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수로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여 그의 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이 정말 충격적입니다. 야고보의 자기소개는 너무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종’.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예수가 내 인생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고백입니다. 그런 그가 인생이 바뀝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끝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 야고보가 마지막 5장에 기도에 대해 말씀을 강조하고 이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야고보의 별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낙타 무릎'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오랫동안 했던지 무릎에 굳은살이 배겨서 낙타 무릎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릎 꿇어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18절까지 총 6구절 가운데 '기도'라는 단어가 몇 차례나 나옵니까? 모두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강조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야고보에게 있어서 기도가 무엇이냐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고 하나님과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누고 싶은 사랑의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는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도 자신 앞에 있는 이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한때 예수를 무시하고 심지어 반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 인생에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 때, 그는 더 이상 과거에 메여 있지를 않았습니다.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야고보는 구원받은 이후에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 앞에 깊은 사랑에 빠져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사랑이 있으면 만나고 싶잖습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옛날에 여러분 연애할 때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만나기를 원했습니까? 또 만나면 그냥 헤어집니까?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잘 가는지, 그 시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는지,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고 또 만나면 다들 입을 꾹 닫고 있나요? 아니지요? 속에 있는 이야기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 거짓말로 좀 섞어 가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잖아요? 이것이 사랑의 관계잖아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야고보처럼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기도의 줄을 붙잡으라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그 무엇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영적 노폐물, 죄악의 이산화탄소를 바깥으로 빼내는 것이 기도 입니다. 받고, 내뿜는 이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적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기도이기에 엔드류 머레이는 기도가 여과 장치라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여과장치를 통해 내 욕망, 내 이기적인 것이 다 걸러지고 하나님의 뜻만 걸러져서 나온다.’ 맞는 말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내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부족과 누추함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회개 하지 않던 내가 십자가의 사랑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요 이것이 기도의 기쁨입니다. 늘 기도하세요.

 

초대교회를 고발하는 한 상소문에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모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마쳤다." 이 사람들이 찬양하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술 취함과 방탕과 섹스등 지나친 쾌락이 당대의 가치관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먹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목구멍에 손을 넣어 음식을 토해내고 다시 맛있는 음식을 집어넣고 부른 배로 호모섹스를 즐기며 살던 바로 그 시대였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이 시대에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빌딩마다 술집으로 들어 차 있고 세계 어디를 가도 젊은이들 사이에 마약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엔 진정한 웃음과 노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수들이 진정한 노래가 어디 있을까? 하고 마약에 취해 보는 겁니다.

 

이게 인생이요 이 세상살이입니다. 바로 이런 시대 속에서 신앙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기도는 우리에게 찬송을 가져다줍니다. 인생은 고난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즐거움의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 기도를 잊지 않듯이 즐거움의 순간에 찬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곧 잘 감사와 찬양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고난 중 기도해야 할 일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즐거움 중에 찬양하는 일입니다. "너희 중에 즐거움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저는 찬송할 것이요" 기도는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다시 찬송하도록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주십니다.

 

.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 들었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벼운 질병에 걸려서 어렵지 않게 대처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었다는 것은 질병 때문에 몸도 힘들고, 또 마음도 힘들고, 나아가 그 영혼도 힘든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질병이 그 사람에게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이 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문제 앞에 서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함께 묶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다가 질병만큼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는 고난도 없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의 가족이 병으로 쓰러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간 하던 일, 꿈꾸고 계획하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정신적 고통, 경제적 손실로 인하여 한 인간과 가정이 졸지에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평소 건강만큼은 자신만만해 하고 무척이나 패기 만만해 보이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쓰러져서 오랫동안 병상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때 기도하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적으로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서, 또 바이러스를 전파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고 해서 사람 사이까지 멀어지면 안 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야 하지만,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더구나 교회당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과 멀어지지 않도록 심리적 거리 좁히기에도 우리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전화나 SNS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함으로 우리가 한 믿음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시대 앞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3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명의 영혼을 주 앞으로 인도하고 5명을 품고 기도하며 내 영혼이 병들지 않기 위해 예배에 자리에 내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엎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지체 말고 우리의 토굴을 기도와 찬양의 제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면 찬양과 기도의 소리로 가득한 처소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의 찬양과 기도 소리를 매일 듣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들이 고단한 삶 속에서 은은히 울려 나오는 아름다운 천국의 찬양을, 아름다운 기도 소리를, 감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17-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여기 누가 등장합니까? 엘리야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둘을 꼽으라면 모세와 엘리야를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놀라운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엘리야도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말씀도 전파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불이 내리게도, 물이 내리게도 했습니다. 갈멜산 정상에서는 불이 내리게 했는데 그것은 심판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도 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기근이 임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면 다시 비가 내린 것은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표현은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초월적 능력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을 푼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상상이 가는 일입니까? 그의 기도는 상상을 넘어선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자기 목숨을 취하러 온 이세벨의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도망자가 됩니다. 한참 도망가다 로뎀 나무 아래서 낙심천만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합니다. 왕상19:4절에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그 당당하던 모습, 기적을 행하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런데 여기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시대를 열고, 한 시대의 재앙을 끝나게 했던, 하늘 문이 열리게 했던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기도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적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특이하게 합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할까요?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간절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몸을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기도하는 모습에는 간절함을 볼 수 없습니다.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할 때, 죽기 내기로기도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생명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17-18절에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엘리야도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지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지만 기도함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길은 기도입니다.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라 말뿐인 신자가 아니라 능력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하늘이 닫혀 있는 듯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하늘문을 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늘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깨어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의 모든 닫힌 문들이 열릴 줄 믿습니다. 가족들이 고생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기도를 드리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해) 찬양대에 악보 주기

 

아무리 힘든 시대이지만, 아무리 많은 변해버린 시대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대가 변할 때 사람들은 세상의 힘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아야 하고, 문제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아무리 많은 것들이 변한다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믿음으로 겸손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늘 문은 오늘도 열릴 줄 믿습니다. 이제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를 두렵게하고 힘들게 하는 이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기도입니다. 낙타무릎처럼 산 이 야고보의 모습이야말로 오늘의 현실을 견디어내고 이겨내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동성의 식구들 그리고 이 방송을 시청하는 모든 분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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