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인생 시 121:1-8. 2021. 12/26 송년 예배
우리 교회와 오랫동안 교제 해온 제주도 한경면에 있는 한경 교회를 아실 것입니다. 그곳 학생들이 두 차례나 우리 교회에 오기도 했고, 또 우리 청년들이 3번이나 수련회를 간 장소입니다. 이 교회에서 조금 가면 올레길 13번 코스가 나옵니다. 그 올레길을 가다보면 길가에 자리하고 있는 ‘순례자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민가가 없는 한적한 들판, 올레길 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배와 목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 작은 냉장고에 시원한 물이 준비되어있고, 차분하게 앉아서 묵상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있습니다. 올레길을 걷던 사람들이 잠시 쉬면서 영혼의 안식을 얻고, 순례와 같은 인생길에서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해 줍니다.
주목할 것은 교회의 이름을 ‘순례자의 교회’라고 붙여놓았다는 것입니다. 올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순례와 같은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지 않아도 올레길을 걸으며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저 천성을 향해 걷는 순례와 같은 것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 교회당 정면에 이렇게 켈리그래피(예쁜 서체)로 써놓았습니다. “길 위에서 묻다” 그렇지 않아도 쫓기듯 살다가 무엇인가 사색하고자 올레길에 오른 사람들에게 물으라고 권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 위해 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고 권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오늘이 송년주일입니다. 2021년을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여행자들이 순례자의 교회에 들러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면서 안식을 얻는 것처럼 이 시간 주 안에서 잠시 쉬면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례자의 교회에 들어서며 “길 위에서 묻다”라는 말을 보면서 여행자들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생의 나아갈 길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갈 순례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추정되는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향하는 순례길에서 한 순례자가 지은 노래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벨론에서 고향 가나안땅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특히 광야길을 지나야 합니다. 어림잡아 그거리만 봐도 1500킬로미터 정도가 되고, 걸어서 여행하는 기간도 무려 네 달이 넘어 걸렸습니다. 노숙을해야 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가로지르고, 강도의 위협을 피해야 하는 등 힘겹고 고단한 여정입니다. 시인은 이 여정을 따라 걸으며 이 시를 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여정이야말로 고단하고 힘겨운 길이지만, 그 길이 순례길이라고 생각하고 이 시를 쓴 것입니다.
1. 항상 지켜 주시는 하나님 (3-4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기 3-4절에 계속 나오는 “졸지 않고 지켜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켜주심에는 실수가 없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 1-2절에 보시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기자는 자문자답해 봅니다. 여기서 ‘산’은 아마도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산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광야 길에 도움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우리 인생을 도우시는지 노래합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8개의 구절에서 지킨다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6번이나 나옵니다.
지금 이 순례자가 걸어가는 길을 성경은 광야라고 합니다. 모세는 신1장에 광야를 ������그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에 많은 위험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연히 그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물을 구하지 못해 모세에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마실 물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들도 물을 달라고 엉엉 웁니다. 짐승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질 것 같은 정말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천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 길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다 고정을 시켜야 하는 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이 시인은 당시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광야 길을 걷다 보면 두 가지 시각이 나타납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문제지만, 그 상황을 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40년의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당시 광야길을 걷던 백성들은 숨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인도자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의 것, 곧 눈앞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각의 차이입니다. 광야 길을 가는데 사사건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신1:32절에“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광야 길에서 자신과 민족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지만, 백성들은 환경과 상황만을 보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은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차이입니다. 저는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근본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여시던 하나님,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던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시던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고백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오늘의 나의 어려움 앞에서는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또 다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프랑스의 샤를르 푸코라는 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하라 사막에 들어가 선교하다가 원주민이 쏜 총에 순교했습니다. 그분이 쓴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책에서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십니까? 그는 이 질문에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그런데도 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성경과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합니까?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만큼 그 사실을 내가 인식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경건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쌓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항상 하나님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2. 어떤 상황에서나 지켜주시는 하나님(5-6)
5-6절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5절 보면, ‘네 우편’에 ‘그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우편’은 공간적 방향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6절 보면,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순례자에게 있어서 광야 길에 가장 힘든 것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이는 사막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막이 없기 때문에 사막이 얼마나 힘든 곳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햇볕이 얼마나 뜨거운지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더위입니다. 그런데 그늘에만 있으면 그렇게 뜨겁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이나 그런 사막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때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그런 고난과 역경의 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험난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런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습니다. 그런 역경과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도 우편에서 우리의 그들이 되어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 있는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너무 잘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다윗에게도 고난이 있었고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통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셨음을 알았습니다.
3. 육체와 영혼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8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7절(하)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육체가 안전해도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리면, 잘못된 사상이나 욕망에 사로잡히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마음과 영혼조차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병, 마음의 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 ‘은둔형 외톨이’가 많다는 겁니다. 그들은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접촉하기도 싫어하고,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콕 박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콕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10-30대에 걸쳐 20-30만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되고 풍요로워지면서 오히려 영혼이 빈약해지는 겁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1970년대부터 그런 현상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히키코모리’(방안에 틀어박힘)라고 부르는데, 1억 2천 인구 중에 무려 1%에 해당하는 12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마음의 병이 들은 겁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파스칼은 우리 마음에 세상에 그 무엇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절대 공간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수가 여인을 보십시오. 이글거리는 태양을 맞아가며 대낮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야곱의 우물을 찾는 여인은 물 한 모금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분명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 물만이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진정한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례자는 광야 길에서 묻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내 인생이 얻고자 한 진정한 삶의 의미는 바로 내 인생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벌써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길위에서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혹시 금년 한 해를 세상만 바라보며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코로나 위기 속에서 염려하며 불안에 떨며 쫓기듯 살아오다가 시선이 아래로 낮아지지는 않았습니까? 살아오면서 뭔가 짓눌린 것 같고, 이젠 기쁨도 없고, 삶의 의미도 사라지고, 세상이라는 이 거대한 울타리에 가두어진 채 허무하게 살아오진 않았습니까? 이 시간 본문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눈을 들어 산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저 천성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순례자로 순례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